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상황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한국을 비롯해 코로나비루스 감염 확산이 다시 우려되고 있어요. 꼼꼼한 방역을 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화하는 생활 속 거리두기에서 다중이용시설 이용 중단, 모임이나 행사 취소 등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방역 단계가 격상되는 지역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점점 더워지는 날씨 때문에 걱정입니다.
마순희: 맞아요.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마스크를 착용한다는 게 힘들긴 하죠. 하지만 지금이 바로 감염 차단의 성패를 가르는 중대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코로나비루스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역 수칙이 마스크 착용 생활화라고 하는 만큼 무더운 날씨로 힘들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겠고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자발적인 방역 수칙을 준수해야겠습니다.
김인선: 맞습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자신의 감정 관리도 잘해야 할 것 같은데요. 코로나비루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정신적인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사람들과의 소통이 줄면서 외로움이나 무력감을 느끼고 또 자신도 전염될지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불안감이 커진 거죠. 그래서 ‘코로나’ 비루스와 우울한 기분을 뜻하는 영단어 ‘블루(blue)’를 합쳐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도 생겼고 정신건강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심리방역도 필요한 겁니다.
마순희: 심리방역이라는 말씀, 참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병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비루스로 외로움, 무력감, 걱정, 두려움 등을 느끼는데 그게 바로 마음의 병이 아닐까 싶고 그런 마음의 병을 이겨내는 심리방역이 필요하다는 것도 절실히 실감합니다. 특히 우리 탈북민들에게는 평상시에도 마음의 위로가 많이 필요하거든요. 걱정이나 근심, 자신의 상황 등을 마음 놓고 이야기만 해도 위안이 된다고 합니다.
제가 상담사로 근무할 때 심리적 어려움 때문에 상담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적지 않았는데요. 저라고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공감을 하면서 들어주니까 자신의 심정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면서 속이 조금은 후련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늘의 주인공도 제가 상담사로 근무하면서 전화로 만났던 내담자 중의 한 사람인데요. 2004년에 한국에 온 서영희 씨입니다. 서영희 씨는 1998년에 북한을 떠났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정착한 지 올해로 16년차가 됐습니다. 지금은 부산에서 반찬가게 일을 하면서 봉사단 단장으로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희 씨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땐 마음의 상처가 많았는데요. 허리도 많이 안 좋아서 제대로 된 일자리도 찾지 못했습니다. 심리적으로 더 위축되면서 몸과 마음의 상처는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서영희 씨는 가장 어려울 때 탈북민의 정착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의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인선: 콜센터는 쉽게 말해 뭔가를 문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업체나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궁금한 점이 있을 때 누구든지 전화해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전화창구를 말하니까요. 남북하나재단에서는 탈북민이 남한사회에 적응할 때 생기는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종합상담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희 씨가 전화한 곳이 상담콜센터인 거죠.
마순희: 맞습니다. 탈북민들에게 정착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동포사랑’이라는 책자가 있는데 그 책자를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모두에게 보내주거든요. 서영희 씨는 그 책자에 적혀 있는 콜센터번호를 보고 전화를 걸어 고민 상담을 하게 됐던 겁니다. 그 전화를 제가 받았던 거고요. 저한테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병이 나았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면 제 살길 찾기 바빠지는데 서영희 씨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영희 씨는 봉사단체를 꾸려 후배 탈북민들을 돕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희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다른 탈북여성들도 영희 씨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국 정착생활에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인데요. 서영희 씨의 정착 사례는 남북하나재단에서 격월로 발간하는 책자 ‘동포사랑’ 2014년호에 실리기도 했고 재단홍보 동영상에도 출연했습니다. 요즘처럼 코로나비루스로 마음이 지친 시기에 심리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적인 정착을 한 서영희 씨의 이야기가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서영희 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녀와의 첫 통화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2011년 제가 남북하나재단 콜센터에서 근무할 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인데요. 당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영희 씨의 목소리에 간절함도 있었지만 무언가 터놓지 못 하고 주저주저하는 망설임도 함께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북한의 함경북도가 고향인 사람이에요. 어려운 점이 있으면 함께 풀어나가요’라고 했거든요. 서영희 씨 역시 그때의 상황을 지금도 잊지 못 한다고 늘 외우기도 하는데요. 영희 씨는 제 말을 듣는 순간 친정언니를 만난 것 같은 마음에 울음부터 나오더랍니다. 한참을 울던 영희 씨는 서서히 마음을 진정하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시작했는데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영희 씨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저도 함께 눈물을 흘렸던 그때의 상황을 저 역시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특히 갓 정착한 탈북민들에게는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아픔들이 있을 거 같아요. 그럴 때 동향 선배의 한 마디는 굉장히 큰 위안이 되겠네요.
마순희: 그렇죠. 그래서 상담근무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통화를 하면서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사연 없는 탈북민이 없다고 대다수의 탈북민들이 비슷한 아픔이 있겠지만 본인에게는 자신의 상황이 가장 가슴 아프고 처절하니까요. 영희 씨도 마찬가지였죠. 어렸을 때에는 여섯 남매 중 막내딸로 사랑을 받으면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5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얼마 후에는 어머니마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단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은 20대 초반인 서영희 씨를 괜찮은 집에 시집을 보냈습니다. 결혼도 하고 딸도 태어나고, 이제는 영희 씨의 고생은 없는 줄 알았는데 불행이 연이어 들이닥쳤습니다. 딸이 14개월이 될 때 남편이 간 복수로 앓다가 사망했고 가세는 급속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아무리 영희 씨가 노력을 해도 어린 딸에게 강냉이 죽조차 배불리 먹일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때부터 영희 씨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와야 딸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인선: 중국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너무 위험한 길을 선택한 거 아닌가요?
마순희: 네. 그래서 서영희 씨는 무려 네 차례나 잡혀서 북송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오라버니들이 힘(빽)이 좀 있어서 빼 내기는 했지만 거듭된 북송 조치에 1998년, 8살이던 어린 딸을 언니집에 맡기고 곧 돈을 벌어 가지고 온다고 북한을 떠났습니다. 북송의 위험을 피해 서영희 씨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이 바로 한국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중국에 있는 독일 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대사관 진입부터 실패했고 이후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의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겨우 망명에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영희 씨는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한국에 혼자서 입국했고 탈북민 초기적응교육과 정착지원을 해주는 하나원에서 교육을 마친 후 부산에 거주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한국 정착하기까지 정말 험난한 과정을 겪으셨네요. 하지만 북한에 두고 온 딸도 걱정일 테고, 한국에 정착하는 것도 어려운 숙제 같은 일인데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헤쳐 갔을지 궁금합니다. 영희 씨의 한국 정착이야기는 다음시간에 이어가 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