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의 코로나비루스 신규 확진자가 6일 연속 1000명대를 기록하는 등 4차 대유행이 시작됐습니다.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서는 7월 12일부터 거리두기 4단계가 적용되고 있는데요. 오후 6시 이전에는 4명, 오후 6시 이후로는 2명까지만 모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야간외출'을 제한한다는 의미죠. 봉쇄 없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강도의 조치를 취하면서 남한 정부에서는 최대한 빨리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겠다고 밝혔는데요.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중소 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의 입장에선 막막하고 한숨만 나옵니다. 탈북민들 중에도 이런 상황에 처한 분들.. 참 많으실 텐데 걱정이네요.
마순희: 네, 맞는 말씀입니다. 밤거리가 한결 적적해졌더라고요. 우리 집에서 창문만 열면 보이는 동네 닭집이 있는데요. 밤마다 불빛이 찬란하고 웃음소리, 이야기소리와 함께 튀긴 닭고기 냄새가 넘치던 그곳도 저녁장사를 안 하는지 실내가 캄캄하더라고요. 코로나 비루스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분들이 직접적으로 영업을 하시는 중소 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일 것입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서, 특히 우리가 성공사례를 취재하면서 만났던 많은 분들이 중소 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모두들 잘 견디어 내고들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오늘 성공사례에서 소개해 드릴 분도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요. 2007년에 북한을 떠나 2008년에 한국에 정착해 경기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5년차 북한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허은미 씨입니다.
김인선: 코로나비루스 유행이 길어지면서 안타깝게도 문을 닫는 상점들이 정말 많은데요. 자영업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가격을 낮추고 배달을 시작하고 또 포장방법을 개선하는 등 저마다의 방안을 마련해보지만 여전히 어렵다고 해요. 은미 씨가 운영하는 식당도 마찬가지일까요?
마순희: 그렇죠. 은미 씨네 가게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은미 씨는 잘 견디어 나가고 있더라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은미 씨도 살아남기 위해 방안을 찾았으니까요. 지금은 가까운 곳 배달은 물론이고 배달 소포사업인 전국택배서비스까지 하면서 가게를 운영해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택배비가 조금 비싸더라도 고객이 오늘 주문하면 내일 받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빠른 배송업체를 이용한다는 말에 조금 더 이익을 얻기보다 고객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전국에서 은미 씨 식당으로 음식을 주문할 정도면 음식 솜씨를 크게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 같은데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북한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라 탈북민들이 주로 찾는데요. 한번 맛보면 자꾸 생각이 날 정도라고들 하니까요. 저 역시 은미 씨네 식당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 함경도식 농마국수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를 비롯해서 탈북민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전국적으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지금의 식당을 열기까지 8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2008년 한국에 입국한 후 은미 씨가 처음 정착한 곳은 이종사촌언니가 살고 있는 제주도였습니다. 탈북민들이 거주지를 정할 때 서울, 경기 등 수도권지역을 선호한다고 하지만 먼저 나와 한국에 정착한 가족이 지방에 있는 경우엔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하거든요. 제주도에 정착한 언니가 비록 사촌이지만 은미 씨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었기에 은미 씨는 제주도를 선택했습니다. 사촌 언니는 먼저 정착한 선배답게 은미 씨에게 한국생활의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 주었습니다. 은미 씨는 언니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백’이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하나원을 나와 제주도에서 정착을 시작할 때 은미 씨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김인선: 남한 정부에서 만 35세까지의 탈북민을 대상으로 일반대학의 학비를 지원하고 있잖아요. 전문대나 인터넷으로 대학과정을 교육하는 사이버대학의 경우엔 나이 제한도 없고요. 그래서 탈북민 중엔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만학도가 많이 계신데요. 30대 초반의 은미 씨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면서요?
마순희: 네. 보통 30대 나이 정도면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대학공부를 선택하는 동료들이 많았지만 은미 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은미 씨는 배우는 것은 차차 살아가면서 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 보내겠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은미 씨는 일자리 찾기가 쉬운 식당 부업부터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손님이 많은 바쁜 몇 시간 동안 일하는 부업부터 시작해서 출, 퇴근 시간이 있는 식당 종업원으로 근무하기까지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은미 씨는 한 식당에서 오랫동안 일하는 것보다 여러 식당을 옮겨 다녔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한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 그만둔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은미 씨는 나중에 자신의 식당을 차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신만의 계획을 세워 순차적으로 준비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나르며 손님의 시중을 드는 일부터 설거지, 음식을 직접 만드는 주방일, 그리고 음식값을 받는 식당의 카운터 보는 일까지! 다양한 식당에서 일하면서 은미 씨는 여러 가지 일을 배우고 경험해 나갔습니다. 은미 씨는 북한에서도 장사를 했던 경험이 있기에 일찍부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김인선: 장사를 안 하고는 먹고 살수 없었다면서 북한에서 지낼 때 장사를 해 봤다는 탈북민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 경험을 밑천으로 해서 남한에서도 장사를 하려는 분들이 계신데요. 충분한 준비 없이 시작하면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똑같은 음식장사를 해도 북한에서와 남한에서의 차이도 있잖아요?
마순희: 그렇죠. 음식 종류부터 맛에 대한 평가까지 남북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북한에서부터 음식장사를 했더라도 남한 사람들 입맛에도 맞는 음식을 만들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은미 씨의 경우엔 음식장사를 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남한에 와서 백지상태로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은미 씨는 북한에서 레자장사를 했는데요. 남한으로 말하자면 장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본이 꽤 있어야 할 수 있는 장사에 해당됩니다. 레자 장사를 한다는 것은 일반 장마당 장사꾼들 중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엄두를 낼 수 있는 거였거든요. 아마도 은미 씨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늘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은미 씨에게 한국행을 제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은미 씨에겐 먼저 한국에 정착한 또 다른 가족, 친 오빠도 계셨습니다.
오빠를 통해 은미 씨는 한국의 실정에 대해 대체로 잘 알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오빠의 제안으로 한국행까지 하게 됐습니다. 다른 탈북민에 비하면 은미 씨의 탈북은 굉장히 순조로웠는데요. 흔히 말하는 직행으로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은미 씨의 오빠는 이미 한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은미 씨의 탈북비용도 지원해 주었기에 은미 씨는 오빠의 도움을 더 이상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촌언니가 있는 제주도로 거주지를 선택했고 언니의 현실적인 조언을 통해 객관적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식당을 꼭 차리겠다는 일념으로 자금을 차곡차곡 모았고 또 어떤 음식을 파는 것이 좋을지 알아보기 위해 식당을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동태탕, 갈비집, 회집. 칼국수집 등 은미 씨는 여러 식당에서 일하면서 경험을 쌓았고 8년이 지난 후 드디어 자신의 명의로 된 지금의 식당을 차렸습니다.
김인선: 허드렛일부터 주방일까지 식당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경험하고 심사숙고 끝에 시작한 허은미 씨의 음식장사는 과연 어땠을까요? 8년이라는 시간동안 내공을 쌓은 후 시작한 은미 씨의 일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