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장마가 시작되면서 날이 후텁지근해요. 습하고 더워서 입맛이 없어진다는 분들이 많은데요. 저는 왜 늘 입맛이 좋을까요? 식사시간을 놓쳐도 어떡해서든 뭐라도 먹거든요. 마 선생님은 어떠세요?
마순희: 저도 매일 적당하게 잘 먹죠. 그렇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배불리 먹거나 하지는 않는답니다. 많이 먹으면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에 조금은 적다싶게 먹거든요. 그리고 가끔 행사나 일정 때문에 끼니를 건널 때에는 빵이나 라면으로 간단히 먹기도 해요. 한국에는 동네마다 크고 작은 빵집들이 많아서 길을 가다가도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잖아요. 마침 오늘의 주인공도 빵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즐겨먹는 빵을 직접 만드는 사람입니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일하는 직원인데요. 제빵기사 최영애 씨입니다. 프랜차이즈라는 것은 원래의 본점이 따로 있고 그 본점에서 재료나 만드는 기술 모두 그대로 가져다 똑같은 이름으로 각 지역별로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는 걸 말합니다. 최영애 씨가 속한 빵집은 ‘뚜레쥬르’ 라는데 이곳도 프랜차이즈 중의 한 곳입니다. 최영애 씨는 2008년 한국 땅을 밟았는데요. 지금까지 제빵기사로 11년차 근무를 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주임이라는 직함을 갖게 되기도 했고요.
김인선: 빵 만드는 일에서 완장을 차신 거네요. 그런데 앞서 영애 씨가 2008년에 한국에 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정착한 지 12년 됐다는 건데 제빵기사 경력이 11년이에요. 취업을 빨리한 편인데요. 원래 빵 만드는 기술이 있었나요?
마순희: 아니요. 빵 만드는 기술은 남한에 와서 생긴 거죠. 영애 씨가 북한에 있을 땐 군수품공장에서 일했으니까요. 원래 최영애 씨의 고향은 평안북도 삭주군이었답니다.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서 계모 밑에서 힘들게 살았는데 그래도 쌍둥이 언니가 있어서 꿋꿋이 잘 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등중학교 졸업한 후로는 군수품공장에서 7년을 일했는데, 어느 날 쌍둥이 언니가 행방불명이 됐대요. 계속 속상해 하는데 얼마 후에 언니가 영애 씨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기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니를 만나려고 압록강을 건넜던 건데 언니는 만날 수 없었고 영애 씨는 인신매매자들에게 속아서 중국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7년을 살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고 기적적으로 언니도 만나게 되면서 한국으로 오게 된 거죠. 쌍둥이 언니의 친구가 알고 있다는 한국의 한 할아버지를 통해서 먼저 오게 된 영애 씨는 1년 만에 중국에 있던 쌍둥이 언니도 데려 올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영애 씨는 하루라도 빨리 언니를 데려오기 위해서 뭐든 배우고 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서 바로 제과제빵학원에 다녔고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금정의 한 제과제빵학원을 다니게 되면 생활비는 물론 교통비나 식비도 대주고 취업훈련 장려금을 줄 때여서 많은 탈북민들이 그곳에서 취업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자격증취득 장려금도 줬다고 하고요. 사실 제빵기사가 되려면 제과제빵학원에서 1년 과정의 교육을 수료해야 하거든요. 그 과정 속에서 실습도 거치고 자격시험도 봐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영애 씨는 2008년 한국에 와서 정착하면서 바로 1년 동안 제빵 기술과 자격을 갖췄고 2009년에 제빵기사로 일을 하게 된 겁니다.
김인선: 그래서 정착기간과 제빵기사 경력의 큰 차이가 없었던 거군요. 사실 제빵기사 자격증을 따는 것보다 실습이 더 어렵고, 실습보다 취업을 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하는데요. 영애 씨는 취업이 굉장히 빠른 편이거든요. 든든한 뒷배라도 있었나요?
마순희: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굉장한 뒷배가 있죠. 바로 최. 영. 애. 라는 자기 자신이 영애 씨의 가장 큰 뒷배였던 것입니다. 영애 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을 했고 그 모습을 인정받은 것인데요. 영애 씨가 학원 공부를 마치고 실습을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지금 가게의 사장님이 현장을 돌아보게 됐고 유달리 성실하고 일솜씨가 야무진 영애 씨를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실습기간이 남아있던 영애 씨를 채용하겠다고 한 겁니다.
김인선: 지금의 사장님이라면 뚜레쥬르 매장의 사장님이잖아요. 뚜레쥬르는 남한에서 제과제빵으로 서열 2위인 회사예요. 제빵기사로 취업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본사에서 진행하는 서류전형과 면접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거든요. 그런데 당시 영애 씨의 경우 제과제빵 학원에서 실습을 하던 학생이잖아요.
마순희: 특별 채용이라고 해야 할까요? 본사에서 제빵기사를 배정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매장 사장이 직접 채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금정의 제과제빵학원과 뚜레쥬르가 업무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실습을 매장에서 할 수 있었고 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차려진 것이니까 어쩌면 운도 따랐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자격증이 있다고 해도 전문제과점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기에 많은 탈북 여성들이 제과제빵학원을 졸업했지만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정말 몇 안 되는데요. 영애 씨는 실습하는 과정에서 바로 취업을 했고 지금까지 잘 하고 있습니다.
취업 속도가 남들보다 빨랐던 영애 씨는 정직원도 남들보다 빨리 됐습니다. 보통은 3개월의 수습기간이 필요했다지만 영애 씨는 보름도 되기 전에 정직원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지금의 사장님은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났던 영애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과제빵에서 기술의 차이는 케이크를 만드는데 있는데 최영애 씨의 강점이 케이크를 잘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의 솜씨가 점주의 마음에 쏙 들었다고 말할 수 있죠.
김인선: 케이크라는 단어가 북쪽의 청취자에게는 낯선 단어겠죠?
마순희: 그렇죠. 저도 북한에 있을 때 외국 소설들을 읽으면서 케이크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맛에 대해 언급하는 것들을 접하면서 케이크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었으니까요. 케이크는 설탕, 계란, 밀가루, 빠다(버터), 소젖(우유), 유지방(생크림)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반죽해 구운 서양식 빵이잖아요. 북한에선 평양을 비롯한 지방도시마다 똘뜨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똘뜨는 케이크를 토르트라고 말하는 러시아에서 온 말이고요. 한국에서도 그전에는 가정집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죠?
김인선: 네, 예전에는 요즘처럼 빵집이 흔치 않아서 집에서 만들어 먹는 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조금 더 건강하게 먹기 위해 집에서 가족들이 먹을 케이크나 빵을 만드는 분들이 있죠.
마순희: 그런데 진짜 빵집에 가보면 고구마케익, 초코케익, 치즈케익 등 그 종류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런 수많은 케이크를 영애 씨가 만들고 또 솜씨가 좋다고 하니 제가 다 뿌듯했습니다.
김인선: 케익도 맛있어야겠지만 빵도 중요하거든요. 본사에서 만들어서 각 프랜차이즈 매장으로 보내긴 하지만 제빵기사가 수많은 빵을 직접 구워야 하니까요. 분명 같은 빵이고 같은 회사 제품인데 매장별로 빵맛이 조금씩 달라서 저 같은 경우에는 빵집을 골라서 가기도 해요.
마순희: 맞습니다. 처음에는 생각 없이 아무 곳에서나 사곤 했는데 영애 씨를 만나고 온 후에는 저도 모르게 늘 뚜레쥬르에서 빵을 사 먹게 되더라고요. 뚜레쥬르는 동종업계에서 2위라고 하는데요. 전국에 매장이 1100여 개에 달하는데 최영애 씨는 전라남도에 있는 뚜레쥬르 매장 중의 한 곳에서 11년차 근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5일 근무를 하다보면 한 달에 9일 정도 쉴 수 있는데 일손이 부족할 때에는 이틀도 쉬고 나흘을 쉴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일상의 휴식도 중요하지만 일손이 딸리면 기꺼이 휴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영애 씨의 말에 평소 영애 씨의 성실성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김인선: 휴식보다 회사 일을 우선시 하다보면 건강에 소홀해지기 마련인데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요즘 근황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갑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과는 여기에서 인사드릴게요.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