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지난해 말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19와의 불편한 동거가 어느새 7개월째에 접어들었는데요. 세계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꾼 코로나19와의 생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치료제와 백신 개발뿐이라고 하죠. 최근 세계 각국이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인데요. 한국도 마찬가집니다.
마순희: 네, 코로나 19가 종식이 될 수 있도록 치료제와 백신이 꼭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모두가 백신개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사실 저는 북한의 상황이 어떤지가 더 궁금합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검색해 보았더니 긴가민가 하는 소식이 있더라고요. 북한은 자국 내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지난 2월에는 치료제 개발에 착수했다고 하더니 7월 중순에는 백신개발에 성공해서 동물실험을 끝내고 임상시험에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면서 어떻게 치료제 개발을 하고 임상시험을 할 수 있는지 참 모순적이더군요.
김인선: 지금도 북한은 코로나19 확진자가 지금껏 '0명'이라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국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있고 국경에서 북한으로 반입되는 물품의 양이 늘고 있기 때문에 격리대상자가 늘고 있다는 얘기는 했다고 하더라고요. 코로나비루스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기 때문에 북한이 예외일 순 없을 겁니다.
마순희: 그렇죠.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겠지만 북한에서는 여러 가지 전염성 질환들이 많았거든요. 우리가 탈북하기 전에 콜레라가 창궐해서 병원마다 입원실은 물론이고 병원 복도에까지 환자들이 누워야 했고 병원 사체실이 문 닫을 새가 없을 정도로 시체를 들이는 모습을 입원실에서 빤히 내려다보면서 두려움에 떨던 기억도 있습니다. 97~98년도 겨울에는 파라티프스라는 전염병이 돌았고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콜레라가 심하면 속옷을 벗을 사이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설사를 자주 하는데 수액을 맞고 수분을 보충시키면 살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수액 3~4통만 맞으면 살 수 있는데도 그 수액이 없어서 사람이 그냥 죽어 나간 거죠. 고열에 시달리는 파라티프스 역시 열을 내리는 약만 먹으면 됐었습니다. 그때 시장에 나가면 유엔 약이라고 우리들이 부르던 작은 외국글자 쓴 알약이 있었는데 그 약만 먹으면 열이 금방 내리더라고요. 그런데 약이 없거나 부족했고 약값도 턱없이 비싸서 일반서민들이 다 사서 먹을 정도가 못 되었습니다. 후에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됐는데 유엔에서 지원물자로 북한에 들여간 약들을 빼돌려서 장마당에서 비싸게 팔아먹었던 거였더라고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전염병에 대한 말을 꽤 길게 했는데요.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주인공과도 관계가 깊기 때문입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자영 씨인데요. 현재 방송국의 아나운서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영 씨는 북한에서 콜레라와 파라티프스가 만연했던 1998년에 전염병 치료를 위해 탈북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북한의 심각한 전염병사태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국제연합, UN에서는 1995년 가을부터 항생제를 비롯한 전염병치료제들을 전달했는데 그 치료제들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거죠. 그래서인지 병을 고치고 싶어서 탈북했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살고 싶어서, 병을 고치고 싶어서 고향을 떠난 겁니다. 가뜩이나 어려웠던 생활형편에 전염병까지 돌았으니 모두들 생활이 말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래도 자영 씨의 경우, 아버지가 당 일군을 하던 가정에서 9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큰 고생은 하지 않고 살았다는데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전염병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항생제나 수액 하나도 보장되지 않아 오빠 셋을 모두 전염병으로 저 세상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자영 씨와 언니도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고 하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유엔에서 지원물자로 들어온 약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더라면 살 수 있는 사람이 많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입니다. 전염병 치료제가 뒤로 빼돌려지면서 북한주민들은 장마당에 가서 비싼 유엔약 같은 출처도 제대로 모르는 외국제 약이나 중국을 통해 들어 온 약을 사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살 수 있었기에 비싸더라도 장마당 약을 사 먹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무상치료제, 의사담당구역제 등의 의료체계 덕분에 현대적인 의료혜택은 몰라도 일상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의료혜택은 꿈도 못 꾸게 되었고 제대로 먹지 못 하니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나빠졌습니다. 제대로 못 먹으니 결국 면역력이 떨어졌고 전염병이라도 돌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제대로 된 치료약이 없어서 많은 사망자가 났던 것 같습니다. 당시 북한에선 비싸게 팔리는 약이라도 구하면 다행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아들 셋을 잃은 자영 씨네 부모님은 남아 있던 두 딸들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자 딸들의 병을 고쳐 보겠다고 중국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8월이었는데 다행히 물이 깊지 않아서 무사히 강을 건너기는 했지만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어 두만강물이 엄청 불어났다고 합니다. 산속에 숨어서 사품치는 두만강물을 바라보던 그날을 자영 씨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요. 그 강을 건넌 덕분에 자영 씨는 중국에서 3통의 수액을 맞고 기적같이 병이 나았습니다.
김인선: 수액은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잖아요.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는 환자에게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할 목적으로 수액을 쓰기도 하지만 남한에서는 체력 보충을 위해서 일상적으로 수액을 맞는 분들도 많거든요.
마순희: 북한에서 맞는 수액 주사는 링게르라고 그냥 포도당 약간에 영점 몇 프로의 소금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액은 수분보충용으로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콜레라처럼 설사가 너무 심하면 몸속의 수분이 다 빠져 나가서 탈수 현상이 생기는데 그때에 수액주사로 수분보충을 해주는 거죠. 거기에 가끔 진통제를 같이 넣어서 맞을 때도 있었습니다. 수액 몇 통을 못 맞아서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말 같지만 그때는 현실이 그랬었거든요. 중국에 들어가면 아무리 숨어 살더라도 약국에서 돈만 내면 영양제든, 항생제든 수액이든 아무 약이라도 마음대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영 씨는 정말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는데요. 수액주사 맞고 병까지 나았기에 자영 씨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김인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니까요. 다만, 어떤 선택이든지 그 책임 역시 자신이 져야 하는데요. 김자영 씨는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요?
마순희: 네, 수액 몇 통으로 건강해진 자영 씨는 중국에서 지내기로 결심했고 자영 씨 가족 역시 자영 씨와 함께 했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삶이었지만 자영 씨는 부모님과 언니가 함께여서 이겨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무엇보다 산간지대에서 살다보니 북송의 위험도 적었습니다. 중국말을 모르는 것이 힘들었지만 점차 지내면서 한두 마디 쉬운 말부터 배우기 시작하다보니 점차 유창해졌습니다. 중국어로 대화가 가능해진 자영 씨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온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자기 가게를 차리고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한국에 가면 돈을 쓸어 모으는 것처럼 벌 수 있다고 했다더군요. 그 말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 자영 씨는 중국에서 지낸지 5년 만에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김인선: 살다보면 가끔은 내 뜻과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더라고요. 북한보다 살기 좋다는 생각에 중국에 남았다는 자영 씨의 인생은 어땠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