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것이 성공! 자립센터대표 강연희 씨(1)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해마다 여름이면 더위 때문에 힘들었는데요. 올 여름은 폭염에 코로나비루스 4차 대유행으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적용되니까 더 힘겹게 여겨집니다.

마순희: 맞습니다. 코로나비루스로 마스크를 벗지 못하다 보니 금년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덥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그래서 마치 재난이 계속되는 기분인데요. 이런 때일수록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해요.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협력인데요. 서로 돕고 보살피는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탈북민들 사이에서도 이런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분들이 많죠?

마순희: 그럼요. 가까운 탈북민들끼리는 평소에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데요. 코로나 여파로 매일 주고받는 문자 인사가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더 자주 문자들을 주고받습니다. 서로를 돕고 보살피는 유대와 협력으로 똘똘 뭉치는 지역자활센터들도 많아서 힘이 되는데요. 성공시대 주인공으로도 손색이 없는 분이 있어서 소개해 볼까 합니다. 서울에서 자활센터를 운영 중인 53살 강연희 씨인데요. 취업이 어려운 탈북여성들을 고용해 일자리를 제공하고 한국사회 정착에 도움을 주는 자활근로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자활근로사업은 생활형편이 어려워서 국가보조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잖아요. 물고기를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할까요? 남한 전역에는 250개 지역자활센터가 있는데요. 탈북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자활센터도 10개 정도 있다고 알고 있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제가 탈북민의 정착과 경제적 자립을 돕는 남북하나재단에서 근무할 때, 당시 이사장님께서 새해 인사를 하시면서 우리 탈북민들에게 지원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하셨거든요.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때 그 말씀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는데 선생님이 이야기하니까 문득 그때 생각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잠깐의 지원 대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법과 원칙을 배울 수 있도록 탈북민을 지원할 테니 당당하게 남한사회의 일원이 되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력하라던 당시 이사장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남한 전역에는 탈북민만을 대상으로 한 자활사업장이 9곳이 있는데요. 탈북민들 가운데 경제활동 능력이 부족해서 취업이 어려운 노인들과 장애인, 여성들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자활사업장에서 몇 시간씩 일하는 것만으로도 탈북민들은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자립이 가능해지는데요. 강연희 씨가 그런 일을 대표로 나서서 하고 있는 겁니다. 연희 씨가 많은 탈북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데 앞장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의 경력 덕분이었습니다. 강연희 씨는 자활센터를 하기 이전에 개인 창업을 했던 경력도 있는데요. 한국에 온지 3개월도 안 됐을 때 정부에서 탈북민에게 주는 기초생활자금을 포기하고 개인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강연희 씨의 배포가 대단하네요. 어떻게 한국 정착 3개월 만에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를 포기하고 창업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쉽지 않은 일이죠. 생계비를 포기하고 창업을 한 연희 씨의 이야기는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동포사랑’이라는 책에도 소개됐을 정도였습니다. ‘동포사랑’에는 한국에 대한 정보, 취업정보와 교육정보, 다른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있어서 탈북민 정착에 큰 도움이 되는 책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북민 대부분이 ‘동포사랑’ 책자를 받아보는 만큼 연희 씨의 사례는 많은 탈북민들에게 정착의지를 북돋아 주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잡지를 받아보면서 연희 씨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사업을 하려면 시장조사부터 면밀히 따져보고 최소 1년 이상을 준비한다고 해요. 연희 씨의 의욕이 너무 앞선 게 아니었을까요?

마순희: 어찌 보면 연희 씨가 무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결단과 패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연희 씨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람마다 서로 다르겠지만 연희 씨의 경우 일단 부딪쳐 보겠다는 강한 의욕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탈북 여성 10명 중 반은 봉제(미싱)일을 할 줄 알고 손바느질도 굉장히 잘 하는데 남한 여성들은 봉제를 잘 안한다는 것을 알게 됐기에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강연희 씨는 그 자리를 탈북여성들이 채울 수 있다고 판단했고 중국에서 지내면서 배웠던 봉제 일을 경험으로 봉제업종 사업자등록증을 냈습니다.

김인선: 남한에도 바느질 잘하고 봉제 일에 능통한 분들이 계시긴 한데요. 시대가 변하면서 바느질에 서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고쳐 입기보단 새로 사 입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특히 제조업이 줄면서 봉제 일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거든요. 나름 틈새시장일 수는 있겠네요.

마순희: 네. 그 점을 생각한 것 같더라고요. 연희 씨가 얼마나 배포가 큰가 하면 손바느질이야 북한에서 지낼 때 해봤지만 봉제 일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강연희 씨는 북한에서 운동선수를 하고 체육선생으로 일했던 분입니다. 남한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한국에 대해 알게 된 연희 씨의 아버지가 연희 씨에게 한국행을 제안했다고 하는데요. 딸이라도 자유로운 세상에서 잘 살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연희 씨는 2006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넘어갔고 북한 보위부와 중국 공안을 피해서 중국 내륙지방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연희 씨는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속이고 중국 내에 있는 한국 기업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인형 만드는 공장이었는데요. 연희 씨는 그곳에서 봉제 기술을 처음 배웠습니다. 연희 씨는 중국에서 3년 간 지낸 후 2008년 여름에 한국땅을 밟게 됐고 탈북민 초기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한 후 거주지 배정을 받고 3개월 만에 봉제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강연희 씨의 배포와 자신감은 웬만한 대장부 못지 않은데요. 거침없이 시작한 사업처럼 운영도 거침 없었을까요?

마순희: 네. 사업장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직원 7명과 함께 2009년부터 시작한 봉제사업을 6년 동안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인형 만드는 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자신 있는 인형사업으로 시작했지만 판로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당찬 연희 씨라도 남한 사회에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탈북민이었기에 판로 개척이 쉽지 않았습니다. 납품할 곳이 없기에 일감을 꾸준하게 지속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 중간에 접을까 하는 마음도 몇 번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희 씨를 믿고 함께 봉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힘을 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연희 씨는 점차 다양한 품목을 생산했습니다. 강아지 용품을 만들고 티셔츠, 앞치마, 천가방(에코백), 이불 등 재봉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다 만들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요? 한 자동차 기업에서 수 만 달러짜리 승합차를 지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연희 씨에게 생겼습니다. 2014년부터 현대차 그룹에서 해마다 탈북민 2명을 선정해 창업용 차량을 지원하는 ‘기프트카’ 사업이 있는데 강연희 씨가 선발된 겁니다. 차량지원은 물론 차량등록에 필요한 세금과 보험료도 지원 받고 창업자금과 창업교육 등 종합적으로 지원받았습니다. 강연희 씨는 유명 연예인들이나 찍는다는 방송광고도 찍었습니다.

김인선: 저도 그 광고 기억나요. 그 유명한 분을 저희 시간에 소개하게 되네요. 남한의 기업에서 하고 있는 사회공헌사업이 연희 씨에겐 인생의 변곡점이 될 만큼의 변화를 일으켰을 것 같은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