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김자영 씨에 대한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자영 씨는 콜레라와 파라티프스가 만연했던 1998년에 전염병 치료를 위해 탈북했습니다. 아버지가 당 일군이라 큰 고생은 안했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의 북한에서는 항생제나 수액 하나 보장되지 않았으니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자영 씨의 부모님의 결정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됐습니다. 9남매 중 아들 셋을 전염병으로 잃은 자영 씨의 부모님은 막내딸인 자영 씨와 자영 씨의 언니까지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니 중국으로 갈 수 있는 선을 놓았던 겁니다. 중국에 가서 수액 3통을 맞자 자영 씨는 병을 털고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수많은 사람들이 초보적인 치료도 받지 못 해서 죽어나가던 북한을 생각하면 중국에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길 리 없었을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가족과 함께였기에 자영 씨는 중국에서 큰 문제없이 지냈습니다. 5년을 지내는 동안 중국어가 늘면서 한국에 올 때 즈음에는 중국 사람과 다름없을 정도로 능통했고 자신의 중국어 실력을 믿는 덕분에 외국어 대학에 진학도 했습니다. 한국말도 능통할 정도로 언어능력이 좋은 김자영 씨는 현재 방송국의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살다보면 가끔은 내 뜻과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더라고요. 분명 내 인생인데 내 운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느낌, 내 운명을 다른 누군가가 움켜쥐고 뒤흔드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요. 특히 중국에서 지내는 탈북민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할 것 같아요.
마순희: 맞는 말씀인데요. 정말 중국에서 살면서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살 때에는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당의 방침대로, 당의 의도대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 철칙처럼 몸에 배어 있어서 억울하거나 불이익을 당해도 참는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중국에 와 보니 비록 불법체류자로 숨어살고 있기는 해도 자유롭게 말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입버릇처럼 외우던 내 운명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는 말은 중국 사람들의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모습에서 느껴졌거든요. 중국에서 우리 탈북민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인신매매자들에게 팔려가야 했고 마음에 없는 사람과도 살아야 했고 실컷 일하고도 품삯을 달라고 하면 불법체류자라고 고자질해서 잡혀가게 하겠다는 협박을 듣기도 하는 등 우리 의지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풍요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땅에서 왜 우리 탈북민들만 이렇게 숨어 살아야 하고 할 말도 못 하고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들 한국행을 선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탈북민들에게 낯설고 어렵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갈망했던 것들이니까요. 자영 씨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가면 돈을 쓸어 모으는 것처럼 벌 수 있다고 한 조선족들의 말은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자영 씨의 생각을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김인선: 일단 선택은 안전하게 잘 하셨는데, 한국을 선택한다는 게 어찌 보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엄청난 도전이잖아요. 자영 씨가 순탄하게 정착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마순희: 네, 낯선 한국에 처음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은데요. 자영 씨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대형 마트에서 일을 시작했고 로임이 적어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도 넘기 힘들었고 열심히 근무한다고 해도 저녁에 통계를 내보면 200원이나 300원이 비었습니다. 그러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일하라고 팀장이 엄청 혼내곤 했는데 속상한 나머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술을 몰랐던 자영 씨였기에 어머니는 걱정스러웠을 겁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하기에 자영 씨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는데요. 담당형사와 지역의 사회복지사였습니다.
자영 씨는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상담을 받게 됐는데요. 사회복지사는 자영 씨에게 아직 나이도 어리니 대학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권유했다고 합니다. 자신 없어 하는 자영 씨에게 한국 사람들은 나이 들어도 공부를 한다면서 젊을수록 공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과 함께 능통한 중국어 능력을 살려서 외국어대학에 가면 된다고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탈북민이 가장 어려워하는 영어공부를 할 수 있도록 탈북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자유터학교’에 연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자영 씨는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자유터에서 영어를 배우고 외국어대학에 특별전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사회생활이 고단하다 보니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공부가 제일 편하고 쉬웠다는 말을 하는데요. 자영 씨의 살짝 늦은 학교생활은 어땠을까요?
마순희: 네. 자영 씨는 대학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자유터학교에서 대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영어공부를 했던 경험으로 대학생활에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대학교육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고 학우관계도 어려웠다는데요. 중국에서는 말을 몰라도 당연하다는 생각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지만 한 언어를 쓴다는 대한민국에서 외래어나 영어투성이의 용어들을 알아듣지 못 할 때에는 정말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밤낮으로 책을 파고 길에서도 책을 붙잡고 다니는 모습에 자영 씨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나도 저렇게 해보자, 나도 할 수 있다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자유터에 가서 꾸준히 영어를 배우면서 대학졸업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졸업 후 지금까지 자영 씨는 한 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답니다.
김인선: 남한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할 줄 모른다는 것에 좌절감이 들고 주눅이 들었다던 김자영 씨 아니었나요? 방송을 진행할 정도면 자신감이 넘치겠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팬션인지 패션인지, 커피인지 카피인지, 비슷한 발음의 외래어가 혼동됐다는 김자영 씨는 하나하나의 용어들을 적어 가지고 다니면서 열심히 말을 익혔다고 합니다. 대학졸업 후 방송국에 취직하려고 갔을 때 그동안의 피타는 노력의 결과로 언어의 장벽을 넘고 당당히 취업했습니다. 그때 자영 씨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소리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하는데요. 이제는 방송 일 외에 안보강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본인은 잘 정착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업무에 충실한 김자영 씨야말로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정착의 귀감이 될 만한 사례라는 생각이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에 더 들었습니다.
김인선: 김자영 씨가 새로운 길을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자영 씨처럼 방송 진행자가 되고 싶은 탈북후배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자영 씨의 사례가 많은 탈북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용기를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영 씨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겁을 먹지 말고 부딪쳐라. 목표를 세웠으면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노력하다보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자영 씨는 앞으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온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그런 방송원이 되고 싶다는 당찬 꿈도 키워가고 있습니다. 자영 씨처럼 이 땅에 정착하는 모든 탈북민들이, 특히 우리 젊은 세대들이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선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면서 또 자신의 몫을 훌륭히 해 내면서 꿈을 향해서 더 높이 날아오르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김인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오롯이 내 몫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든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김자영 씨처럼 말이죠.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