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이따금 꿈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꿈에나 그리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면 믿기 힘들어서 ‘볼 좀 꼬집어봐’ 하고 묻기도 하는데요. 때로는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생겨서 ‘꿈일 거야’, ‘꿈이었으면..’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성공시대 주인공들의 삶을 들어보면 꿈같은 이야기가 참 많은데요. 오늘은 어떤 분을 소개해 주실지 궁금하네요.
마순희:네, 오늘의 주인공은 꿈같은 일을 실현시킨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난 2007년에 한국에 입국해서 올해로 한국정착 14년차인 김정희 씨입니다.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에서 살다가 1997년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스무살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탈북했던 정희 씨는 1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는데요. 한국정착 8년 만에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뤘습니다. 내 집이 생기면 내야 할 세금도 늘어나는데 정희 씨는 동료들이 모두 내는 재산세를 자신도 내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보기 드문 똑순이, 김정희 씨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인선: 한국에서 내 집 갖는 게 서민들의 꿈이잖아요. 그런데 정희 씨는 한국정착 8년 만에 자기 집을 장만했군요.
마순희: 맞습니다. 정희 씨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희 씨는 고난의 행군시기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스무살의 어린 정희 씨가 가정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는데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가기만 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했던 아버지는 누이동생과 함께 딸 정희 씨를 데리고 중국으로 들어가기를 결심하게 됐던 겁니다. 중국에 일가친척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정희 씨네는 어느 한 농촌에 숨어 살게 되었다는데요. 북송의 두려움으로 경찰차 소리만 들려도 소름이 끼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살 수 있었던 건 온 가족이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살아왔기에 동네에서 평판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혹여 공안국에서 단속이라도 나오게 되면 미리 알려주어서 피하게 도와주기도 했다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안심하며 지낼 순 없었습니다. 정희 씨의 경우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도 낳아 키우면서 남편과 함께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불법체류자의 신세다보니 늘 불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의 드라마들을 보면서 한국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고 북한을 떠난 지 10년 만인 2007년에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정착 초반에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정희 씨의 경우엔 남편이 먼저 한국에 나와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수월했다고 합니다. 남편뿐 아니라 아버지와 남동생도 한국에 나와 있었다고 하는데요. 가족이 가까이 있었기에 초기 정착할 때에 많은 의지가 됐을 겁니다. 정희 씨는 남편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저축하면서 돈을 모아 나갔는데요. 중국 시부모님 댁에 두고 온 아들을 하루 빨리 데려오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부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서 함께 노력한 덕분에 집도 장만하고 중국에서 아들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년 전에는 작은 아들도 태어나서 경사에 경사를 더 하기도 했답니다.
김인선: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는데.. 솔직히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룬 정희 씨가 참 부럽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만한 노력이 있었겠죠. 정착하기도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는 탈북민도 많은데 정희 씨가 정착을 넘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마순희: 사실 우리 탈북민들은 하나원에서 나오면서 나라에서 주택을 배정받아서 나오기 때문에 주택 걱정은 크게 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다만 임대주택이기에 자신의 명의로 된 주택에서 살고 싶은 욕망으로 열심히 벌어서 집 장만하는 분들도 많답니다. 저희들처럼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임대주택이라도 너무 좋고 편하다는 생각에 내 집 장만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있지만 특히 젊은이들은 임대주택에서 살기보다 자신의 명의로 된 ‘내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하더라고요. 더구나 정희 씨는 임대주택을 배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기 집을 더 원했던 것 같습니다.
김인선: 한국에 정착하는 탈북민들 모두에게 임대주택이 제공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못 받았을까요?
마순희: 한국에 정착하면 탈북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임대주택을 제공해주는 걸로 아는 한국 분들도 많이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임대주택을 받지 못 하는 경우들도 간혹 있습니다. 미성년자가 혼자 한국에 입국했을 경우에 그런데요. 만 24세가 되고 자기 주택을 주어도 관리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인정되면 자신의 명의로 주택을 받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기숙형 대안학교나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기숙시설에서 생활하니까요. 또 먼저 입국한 가족이 주택을 받았고 후에 가족이 나오게 되는 경우에 합가가 원칙이라 새로 임대주택을 제공하지 않죠. 다만 가족이 먼저 나와서 정착하고 있더라도 결혼을 한 상태이거나 후에 나오는 가족이 결혼한 상태로 함께 나오거나 자녀라도 동반해서 나오면 후에 나오는 가족이 따로 주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희 씨의 경우엔 하나원 나올 때 부모님이 먼저 한국에 나오셔서 주택을 받았기 때문에 주택을 따로 받을 수는 없었는데요. 만 30세가 안 되다보니 독립적인 세대로 인정되지 않고 먼저 나온 가족과 합가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희 씨가 아들을 데리고 입국했다면 당당하게 독립적인 가족으로 집을 받았을 것입니다. 정희 씨는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기보다 하루 빨리 돈을 벌어서 자신의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고 그런 마음이 정희 씨를 더 분발하게 하고 열심히 살게 했습니다. 나이는 어려도 한 아이의 엄마이자 주부였기에 독립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요. 정희 씨는 남편과 함께 작은 옥탑방에 세집을 얻어서 살림하면서 지냈습니다. 소비는 최대한 줄이면서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은 기본이었다는데요. 남편과 둘이 벌어서 월 300만원(2천5백 달러) 정도는 무조건 저축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소득이 어느 정도면 그렇게 많이 저축을 할 수 있죠? 자세히는 몰라도 매달 2천 5백 달러를 저축하려면 생활비를 엄청 아꼈다는 얘기 같은데 한국에서 한 아이를 키우면서 살려면 생활비가 1~200만원(850달러~1700달러)정도는 들텐데, 주변 사람들에게 정희 씨 부부는 구두쇠라고 소문이 났겠어요.
마순희: 구두쇠 소리를 들으려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있어야 하겠죠? 정희 씨는 오직 돈을 모아서 하루 빨리 집도 장만하고 아들도 데려와야 한다는 마음이었기에 친구들이랑 함께 한가하게 놀려 다니면서 어울릴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2천 5백 달러가 아니라 2백 50달러도 꾸준히 저축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희 씨 부부가 정말 대단한 거죠. 처음 2년간은 옥탑방에서 월세로 살았는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저축으로 나가는 돈에 다달이 방값까지 하면 부부가 먹고 쓸 수 있는 돈은 정말 얼마 안 됐을 겁니다.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월세 2년을 살고 전세를 장만했고 전세 장만한지 6년 만에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장만했으니 자신이 돌이켜 보아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김인선: 맞아요. 중간에 풍족하게 써보고 싶은 유혹도 많았을 텐데.. 정희 씨는 정말 한 눈 팔지 않고 살아오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들려주신 김정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기본으로 생각해보면 근면, 성실은 기본이고 돈을 쓰는 일보다 모으는 일에 더 능통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보통의 여자들은 예쁜 것 보면 사고 싶고 갖고 싶어 하잖아요. 정희 씨는 정말 물욕이 전혀 없는 분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기에 큰돈을 저축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만 한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