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 활동가 고미영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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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한국정착 17년차인 고미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2004년에 한국에 입국한 미영 씨는 중국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숨어서 지내다가 4년 반 만에 한국땅을 밟게 됐는데요. 당시 미영 씨의 나이는 39살! 대학공부도 가능한 나이 였지만 미영 씨는 일과 자격증 공부를 선택했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미영 씨에겐 책임져야 할 두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애들을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고 또 간호조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에서 배우기도 하면서 열심히 정착해 나갔습니다. 미영 씨가 간호조무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 하나원에서 만난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북한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던 친구였습니다. 미영 씨에게 자신이 도와줄 테니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했고 미영 씨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에 친구와 함께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간호사를 보조하는 업무와 의사의 진료보조를 하는 역할을 하는 간호조무사가 되려면 자격증이 필요했습니다. 국가시험까지 통과해야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데 의학용어가 많아서 탈북민들에겐 결코 쉽지 않은 과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영 씨는 그 과정을 모두 마쳤고 자격증 취득 후 곧바로 출산을 한 산모와 신생아를 보살피는 산후조리원에 취업도 했습니다. 산모와 아기의 건강상태를 24시간 최상의 서비스로 돌봐주는 남한의 산후조리원을 보고 미영 씨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산모뿐 아니라 그 가족들을 대하는 일까지 소홀하면 안 되고 산모가 모유 수유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동안 아기를 계속 돌보는 것도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미영 씨는 남한문화에 맞는 서비스를 하나하나 차분히 배워 나갔고 점차 업무에 익숙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3년 차가 되던 어느 날 미영 씨에게 산후조리원에 다닐 수 없는 뜻밖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중국에 있던 남편이 국제결혼 수속으로 한국에 입국해 함께 살게 되면서 미영 씨에게 셋째 아이가 생긴 겁니다.

김인선: 축하할 일이네요. 그런데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육아휴직제도가 있으니까요. 신생아부터 초등학교 2학년 이하까지의 자녀가 있는 남녀 근로자 모두에게 해당되는데요. 급여의 일정부분을 받으면서 1년을 쉴 수 있어요. 혹시 미영 씨가 이런 제도를 몰랐을까요?

마순희: 아닙니다. 6개월 이상 근무한 경우엔 누구라도 육아휴직제도를 쓸 수 있다는 걸 저희 탈북민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젊은 세대에서는 이용을 많이 하고 있는데요. 미영 씨는 조금 달랐습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신이라고 말하기 쑥스러워서 미영 씨는 산후조리원 측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갑자기 지방에 내려가게 돼서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런데 지방에 내려가지 말고 그냥 근무할 수는 없는지 몇 번이고 전화가 왔고, 미영 씨는 ‘그동안 내가 잘 못 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미영 씨는 일을 그만 둔 뒤 뱃속 아이와 자신의 건강을 챙기며 지냈고 43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셋째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선 늦은 나이도 아닌데, 괜한 걱정을 하신 거 같아요. 그런데 궁금해지는 게 미영 씨도 산후조리원 생활을 했을까요?

마순희: 아니요. 미영 씨도 산후조리원에서 산모의 입장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1,300달러(150만원)를 지불해야 하는 비용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큰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영 씨는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2박3일 동안 지낸 후에 집에서 지냈습니다. 출산 후에도 미영 씨는 육아와 가정살림은 물론 큰 자녀들을 돌보면서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어린 셋째를 돌보느라 외출하기가 쉽지 않았던 미영 씨는 인터넷을 활용했습니다. 인터넷 강의를 듣고 노인을 대상으로 놀이를 진행하는 실버레크레이션 지도자, 미술치료사, 건강상태를 파악하고 운동처방을 해주는 건강관리사 자격증 등 각종 자격증들을 취득했습니다. 게다가 운동요소가 가미된 스포츠댄스와 치매전문교육도 받았습니다.

미영 씨가 취득한 자격증이 있는 경우 일정한 소속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덕분에 미영 씨는 자녀들 양육에도 큰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세 아이들 모두 큰 무리 없이 반듯하게 자랄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기쁘다는 미영 씨입니다. 지금 미영 씨의 큰 아들은 서울의 유명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코로나로 원격수업을 계속하다 보니 차라리 휴학하고 부업을 하면서 생활비에 보탬을 주고 있고요. 중국에서 태어난 둘째 딸은 연기자 지망생으로 연극영화학부에 진학 준비 중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은 올해 14살인데 태권도 선수로 유명하다고 해요.

김인선: 세 아이들 모두 미영 씨만큼이나 똑 부러지게 키운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런데 세 아이 키우랴, 그 와중에도 일하랴 바빴을 텐데 사회활동가로는 언제, 어떻게 일하시게 된 거예요?

마순희: 네. 미영 씨는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탈북민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자로 75세 이상이신 어르신들을 돌보는 봉사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힘이 많이 들지만 친정 부모님을 대하는 것 같아 미영 씨는 기쁜 마음이 더 컸다고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미영 씨는 본업인 일정한 소속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 활동보다 봉사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됐습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탈북민을 지원하는 사회활동가 역할까지 하게 됐습니다. 고미영 씨가 탈북민 지원활동가로 일을 시작한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탈북민을 지원하는 사회활동가는 책임감을 갖고 모임을 전담해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미영 씨는 어르신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합창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미영 씨의 노력으로 정부에서 제공하는 어르신 지원사업비를 따게 됐고 일주일에 한 번씩 노래선생님을 초빙해서 전문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미영 씨는 이런 일이 힘들다는 생각보다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이 더 크다고 합니다.

김인선: 사실 이런 분을 보고 우스갯소리로 워커홀릭, 일 중독자라고 하거든요. 일을 잘 하는데, 그 일을 너무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 다른 일을 또 굳이 찾아가면서 하고...그러다 보면 일이 내 인생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지금쯤은 지치지 않으셨을까 싶기도 한데, 어떠신가요, 아직 일을 즐기면서 하고 계신가요?

마순희: 여전히 즐기면서 일을 하고 있답니다. 코로나비루스로 어르신들이 모일 수 없게 되면서 합창모임이 불가능해지자 미영 씨는 자유롭게 시간조절이 가능한 프리랜서로 일을 다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이 없는 날에는 나무를 관리하는 나무치료사로도 일하고 있거든요. 길을 지나다 보면 가끔 나무에 수액을 꽂아 놓은 것들도 보고 부러진 나뭇가지나 벌레 먹은 줄기에 곱게 땜질한 모습을 보게 되잖아요? 나무치료사가 그런 일을 한다고 하네요. 미영 씨는 조경관리업체에 등록된 전문가로 벌써 2년째 나무치료사 일을 하고 있는데 일도 보람 있고 일당도 제법 쏠쏠하다고 합니다.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탈북민을 지원하는 능력 있는 사회활동가로 그리고 나무치료사로 바쁘게 살아가는 지금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고미영 씨입니다. 어르신들에게 즐거운 노년을 선물하고 싶다는 사회활동가로 항상 긍정적이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미영 씨의 앞날이 더 근사해지기를 바래봅니다.

김인선: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고 좋은 평가를 받는 고미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