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학원교사 박소정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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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저희 친정엄마가 입버릇처럼 저한테 하시는 말이 있어요. ‘내가 네 아빠를 설득해서 서울로 이사 온 덕분에 네가 지금 이렇게 살지, 나 아니었다면 넌 우리가 하는 농사일 돕고 자랐을 거야’ 라고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한국에서도 남쪽, 경상남도 분들이신데요. 저랑 제 동생들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고 싶어서 서울행을 결심했거든요. 북한에서도 자식 교육을 위해 탈북하는 경우가 늘고 있잖아요. 오늘의 주인공도 그런 분이시라고요?

마순희: 자식 가진 부모라면 거의 누구나 다 선생님의 부모님들처럼 자신이 좀 더 힘들고 고생하더라도 자식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 탈북민들의 마음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찌 보면 남한사람들보다 더 절박한 마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생활고와 여행의 자유조차 없고 감시와 불신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을 대물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탈북을 결심했다는 분인데요. 올해로 한국정착 14년 차 된 함경북도 출신의 박소정 씨입니다.

김인선: 자식을 위하는 마음으로 탈북 결심을 해도 실행에 옮기는 일이 쉽지 않죠. 많은 탈북민들이 중국이나 제3국을 거쳐서 어렵게 한국 땅을 밟게 됐다고 말하는데요. 그런데 박소정 씨는 거의 직행이었다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소정 씨는 남편과 함께 자녀들을 데리고 2007년에 북한을 떠났는데 같은 해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말 그대로 직행한 거죠. 여느 탈북민들과 달리 소정 씨의 가족이 제3국을 거치지 않고 무사히 한국까지 직행으로 올 수 있었던 건 중국의 실정을 잘 아는 소정 씨 남편 덕분이었습니다. 소정 씨 남편은 중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브로커 선을 미리 알아두었을 정도였습니다.

소정 씨는 2000년도에 큰 딸을 임신했는데 당시 국수사리 한 개를 부수어 시래기와 함께 끓여 먹을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이후의 삶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현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정 씨와 남편은 아이가 생기면서 당연하게만 여기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됐다고 합니다. 소정 씨의 남편은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밤이면 불법이지만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생활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소정 씨가 둘째 딸을 낳을 때에는 강냉이밥은 안 먹어도 될 정도의 생활수준이 됐습니다.

김인선: 북한에서 생활형편이 점점 어려워졌다고 말하는 탈북민들은 많이 봤어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고 말하는 분은 소정 씨가 처음이에요. 남편 분이 수완이 좋았나 봐요?

마순희: 소정 씨 남편뿐 아니라 당시 젊은 청년들 대부분이 낮에는 직장에 출근하더라도 밤이면 중국으로 많이 넘어갔거든요. 그쪽에서 많이 요구하는 명태며 낙지, 해삼 등 수산물을 중국의 사사여행자들에게 팔지 않고 직접 두만강을 건너가서 넘겨주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위험하긴 해도 몇 배의 수익을 내니까요. 또 골동품이나 동선(구리선) 같은 세관으로 통과하기 어려운 물품들을 몰래 날라다주고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반대로 중국 물건들을 가져다가 북한에서 팔면 또 나름대로 수익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활수준은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수입 대 지출을 따지는 북한의 기준에서 볼 때 감시대상이 되었습니다. 안전부와 보위부에서는 소정 씨의 집을 수시로 감시했습니다.

소정 씨와 남편은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커져만 갔습니다. 밥술은 먹는다 해도 언제 어떤 일이 불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고 더욱이 커가는 자식들이 부모처럼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소정 씨도 중국에 자주 드나들던 남편을 통해서 중국의 실정도 알게 되고 또 남편이 몰래 구해온 CD를 통해 한국드라마를 접하게 되면서 ‘탈북’의 꿈을 갖게 됐습니다. 여러 한국드라마 중에서도 며칠 밤을 새면서 몰래 보았던 ‘올인’이라는 드라마가 소정 씨 부부에게 탈북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고 하는데요. 드라마 주인공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또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합니다.

김인선: 한국에서 2003년에 방영된 드라마 ‘올인’은 이병헌 씨, 지성 씨, 송혜교 씨가 대표 주인공으로 두 남자 주인공이 각자의 삶 전부를 걸고 최후의 승부를 벌이는 이야기인데요. 소정 씨는 남편과 함께 드라마 주인공처럼 한국행에 ‘올인’을 했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다른 삶을 꿈꾸게 된 소정 씨 부부는 두 딸과 함께 2007년에 북한을 떠났고 같은 해에 무사히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한국행에 ‘올인’한 소정 씨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승리를 이뤄낸 것입니다. 박소정 씨가 지금 성공시대 주인공으로 소개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한국정착과 관련한 승부에서도 이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쉬웠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소정 씨가 한국드라마를 통해서 보았던 풍요롭고 낭만적인 모습은 현실에서는 처음부터 쉽게 볼 수 없었고 일상생활에서부터 일자리 찾기까지 어느 하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함경도 사투리의 튀는 말투 때문에 소정 씨는 물건 하나 사러 나가기조차 주저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딸이 소정 씨의 부부에게 힘을 줬습니다. 자녀들을 생각하면 생활력이 더 강해지는 두 사람은 먼저 정착한 선배 탈북민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도 받으면서 하나하나 자리잡아 나갔습니다. 소정 씨 남편은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하루 일한 만큼 품삯을 받는 일용직 일부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고 매달 일정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두 딸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소정 씨는 자신도 무엇인가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는데요. 북한과 남한의 용어도 다르고 교육내용이 달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딸의 공부를 봐 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인선: 아이들 교육은 한국 엄마들도 똑같이 느끼는 부분이에요. 자녀들 공부를 봐주고 싶어도 저희 어렸을 때와 다르게 수준도 높고 교육방식도 조금씩 바뀌어서 학원에 보내거나 가정방문으로 지도해주는 학습지 선생님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한국에선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겠다고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뒤늦게 일을 시작하는 엄마들이 많아요.

마순희: 네.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 보내고 직장에 다니는 여성도 많고 상가나 식당에서 몇 시간씩 부업을 하는 여성들도 많더라고요. 탈북여성들도 마찬가지랍니다. 하지만 소정 씨는 직장생활은 고사하고 부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셋째 딸을 출산했기 때문입니다. 소정 씨는 낯선 한국 땅에서 적응하는 일부터 아이들 교육문제까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활용할 수 있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지 찾았고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소정 씨는 마침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교사인데요. 소정 씨는 한국에 와서 셋째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기에 소정 씨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요.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비관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니까요. 보육교사라는 직업이 소정 씨에게 과연 잘 맞는 일, 좋아하는 일이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갑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