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학원교사 박소정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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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잘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놓고 고민을 합니다. 탈북민들도 마찬가지인데요. 한국정착 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신의 일자리를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빨리 찾는 경우도 있는데요. 박소정 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남편과 함께 한국드라마 ‘올인’을 보고 탈북의 꿈을 꾸게 됐다는데요. 두 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실행에 옮겼잖아요?

마순희: 네. 박소정 씨는 남편이 중국을 드나드는 일을 하면서 안전부와 보위부의 감시를 받으며 지냈는데요. 커가는 두 딸들이 자신들처럼 감시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고 합니다. 소정 씨는 남편과 함께 2007년 북한을 떠났고 중국의 실정을 잘 아는 남편 덕분에 한국까지 거의 직행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한 가지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드라마 ‘올인’의 주인공처럼 소정 씨는 한국행에 ‘올인’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이지 않았고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낯선 땅이라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소정 씨는 한국 입국 후 셋째를 바로 출산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남편은 일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된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성실하게 돈을 벌어와도 다섯 식구가 생활하기엔 빠듯했습니다. 소정 씨는 어떤 일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막내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습니다. 여러 일들 중에 아이를 돌보는 일이 가장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기에 소정 씨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셋째 딸 돌이 지난 다음부터 대학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남편 월급으로 다섯 식구 생활비하기에도 빠듯했다고 했는데, 소정 씨가 대학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탈북민들에게 제공되는 학비지원제도 덕분일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만 35세 미만이면서 고졸 이상의 학력을 인정받은 날로부터 5년 이내에 대학교에 입학하면 등록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요. 34살이었던 소정 씨도 교육비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나라에서 설립해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는 국립대학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설립 운영하는 공립대학의 경우 등록금 전체를 지원해 줍니다. 하지만 사립대의 경우 교육비 지원이 50%만 가능했습니다. 탈북민 특별전형으로 소정 씨는 한 사립대학에 가게 됐는데요. 사립대 한 학기 6개월치 대학 등록금이 평균 3,380달러(400만원) 정도 되니까 정부에서 50%를 지원해 준다고 해도 1,690달러(200만원)는 소정 씨가 내야 했습니다. 당시 소정 씨 남편의 한 달 월급이 1,183달러 (140만원)였으니 학비가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소정 씨의 남편은 소정 씨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소정 씨는 보육교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 대학공부에 다시 한 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올인’을 했습니다.

소정 씨는 북한에서 전문대를 졸업했고 그 학력을 인정받아 사립대학교 보육교사 자격 과정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시간 되는대로 집안일도 잘 도와주었지만 대학공부는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 반 학기까지는 영어와 외래어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생소한 보육용 한자용어를 익히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정 씨는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터득하는데요. 애들을 양육하면서 실지 겪었던 경험들을 상기하고 응용하며 공부했다고 합니다. 3학년에 편입을 했지만 1, 2학년 교재들도 모두 구입해 다시 읽어보고 공부했습니다. 박소정 씨는 대학 3, 4학년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보육교사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개인이 운영하는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취직까지 했습니다.

김인선: 어린이집은 북한의 탁아소처럼 갓 태어난 아이부터 5살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봐주는 곳인데요. 개인이 운영하는 보육 기관이 많고 어린이집 대표인 원장이 직접 보육교사를 모집하고 채용하죠. 이때 취업을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 이력서를 보고 1차 선발을 한 후 면접을 보게 되는데요. 이 과정을 여러 번 경험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런데 소정 씨는 한 번에 바로 채용이 됐네요?

마순희: 네, 소정 씨가 다니던 대학은 교회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곳으로 선교사 분들이 많습니다. 빠듯한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소정 씨의 모습을 보고 몇몇 분들이 학비를 모아서 지원해 줬다고 합니다. 남편 혼자 버는 형편에 세 딸을 키우고 적지 않은 대학등록금을 내면서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모두들 응원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낙오 없이 3, 4학년을 무사히 마치고 자격증까지 따낸 소정 씨의 모습에 주변 분들의 지원은 계속됐습니다. 졸업 후엔 소정 씨의 취업까지 연계해 주었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이라 어린이집 원장님을 잘 아는 어떤 분이 소정 씨의 채용을 부탁했고 원장님 역시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김인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탈북민들 중 상당수가 말투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은데요. 소정 씨는 그 고충이 더 컸을 것 같아요.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한창 말을 배우는 나이다 보니까 엄마들이 선생님들의 말투에 신경을 좀 많이 쓰니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있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잘 고쳐지지 않는 북한 말투가 마음에 걸린 원장님은 차라리 강원도 출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는지 의견을 주기도 하셨답니다. 탈북민들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더구나 한창 말을 배우는 자녀들을 북한 선생님이 가르친다고 하면 학부모들의 거부감도 있을 수 있다는 원장님의 이야기가 소정 씨는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혹여라도 고향을 묻는 경우가 생기면 강원도 출신이라고 답한다고 하는데요. 말투로 인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실 소정 씨는 표준 서울말을 구사하기 위해 대학생활 할 때부터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거울을 보면서 연습을 할 정도였는데요. 소정 씨 남편은 너무나도 빨리 변화하는 아내의 말투에 가끔씩은 적응이 안 된다며 놀라기도 했답니다. 보육교사 자격증 외에도 원장님이나 다른 선생님들보다 더 월등한 컴퓨터 활용 능력을 이용해서 지식을 전달하고 누구나 골칫거리라는 복잡한 서류 정리도 깔끔하게 도움을 주면서 소정 씨는 어린이집에 잘 적응해 나갔다고 합니다.

김인선: 소정 씨가 원장님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친근한 역할로 잘 지내신 것 같네요. 그런데 보육교사 일을 그만 두게 됐다면서요?

마순희: 네. 어린이집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보육교사일을 그만 두게 됐습니다. 소정 씨는 일정한 소속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요.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고 봉사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다양한 업무가 가능했습니다. 소정 씨는 지금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체조 지도를 하면서 동네 보습학원에서 초등학교 아이들 학습지도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막내는 어느덧 14살이 됐고 소정 씨의 남편은 변함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큰 아이들은 대학공부를 하고 자신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생님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소정 씨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자식들이 생각할 때 우리 부모님이 잘 살아오셨다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하는 박소정 씨인데요. 지금도 충분히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김인선: 박소정 씨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기분은 어떨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기분을 느껴봤으면 좋겠네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