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이 깊고 큰 용접기술자 김민섭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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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언제쯤 코로나비루스 얘기를 안 해도 될까요? 한국의 방역은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K방역으로 통했는데 다시 늘어난 확진자 숫자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선 지난 8월 30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실시되고 있어요. 실내체육시설 운영이 전면 중단됐고 학원에서도 대면수업이 금지됐고요.

마순희: 네. 보다 강화된 조치가 내려진 거죠. 이번 주가 최대의 고비라는 말을 매주 되풀이해 들으면서 좀 지치기도 하는데요. 조심히 생활하면서 불편하고 힘든 경우가 많지만 서로를 위하는 일이니까 감내해야겠죠? 수도권에서는 이제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음식점이나 술집들은 포장만 가능해지는 등 사회 전반적으로 외부활동을 최소화하는 분위기인데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퇴근 후 매일이다시피 회식이나 모임 등으로 귀가가 늦어지던 남편들이 요즘엔 안전지대는 가정 밖엔 없다는 듯 퇴근하기 무섭게 귀가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기도 하니까요. 어쩔 수 없이 회사생활을 하느라, 또 사업 차 매일이다시피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분들에게는 사회적 거리두기 덕분에 저녁 자리에 대한 부담이 적어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의 주인공도 그런 가장들 중의 한 사람인데요.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용접공으로 장기 근속을 하고 있는 김민섭 씨입니다. 민섭 씨는 올해로 한국 정착 14년차인데요.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최소화하고 가급적이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김인선: 남한에 오니까 집에서 최소한 음식물 쓰레기라도 갖다 버리지 않으면 아내한테 바가지 긁힌다며 푸념하는 탈북 남성분들이 많던데, 민섭 씨는 그 이상으로 자상하신 것 같아요.

마순희: 네. 사실 민섭 씨는 북한에서 살 때부터 가정적인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탈북 남성들도 북한에선 가부장적인 면이 강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른다는 말처럼 한국에 정착하면서 많이 변하기도 하더라고요. 어쩌면 민섭 씨 역시 한국에 와서 더 다정다감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섭 씨가 가정적인 남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북한에서 인연을 맺은 두 명의 아내 덕분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첫 번째 부인과는 불행하게도 사별을 했고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직장에 다니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휴가 차 친척집에 놀러 왔던 지금의 처를 처가 켠 친척들의 적극적인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민섭 씨가 아이가 있는 홀아비였다면 처는 당시 미혼인 여성이었습니다. 민섭 씨 입장에서 봤을 때 너무나 과분한 상대로 생각됐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당시 지금의 부인을 보고 첫 눈에 반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함께 행복하게 사는걸 보면 말이죠.

김인선: 홀아비였는데도 처가 어르신 중의 한 분이 중매를 섰다고 하는걸 보면 민섭 씨에게 굉장한 재력이 있었거나 지위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마순희: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민섭 씨를 많이 도와줘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굉장한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위 높은 간부도 아니었답니다. 민섭 씨는 10여 년간 탄광기계공장에서 일했던 평범한 노동자였습니다. 워낙 심성이 바르고 성실하기로 소문이 났던 터라 처가 켠 친척들의 적극적인 소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아들까지 있는 민섭 씨한테 딸을 주겠다고 결혼승낙을 하게 되기까지는 한 동네에서 살면서 민섭 씨의 사람 됨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친척 어르신들의 역할이 컸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런데 당사자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겠죠? 친척들의 소개로 한 번 만나 본 이후에 오히려 지금의 처가 그때 더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민섭 씨가 그만큼 인품도 좋았고 인물 체격도 나무랄 데 없는, 멋진 청년이었기에 첫 만남에서 일생을 맡기고 함께 가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민섭 씨 처도 첫 눈에 반했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첫 눈에 반한다는 거.. 저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김민섭 씨 부부가 실제 주인공이었네요. 지금도 금슬이 좋은 걸 보면 그동안 힘든 일도 그 마음 하나로 다 슬기롭게 헤쳐 나가셨나 봐요.

마순희: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두 사람은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아들까지 낳아 키우면서 잘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중국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던 처제가 소식을 전하더랍니다. 그렇게 고생하지 말고 중국에 들어와서 돈이라도 벌어가라고 말이죠.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북한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때라 민섭 씨는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5살 된 작은 아들만 데리고 큰 아들은 어머니에게 부탁한 뒤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김민섭 씨는 당시 살을 에는 찬 물에 온 몸이 젖었는데도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아이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회상하는데요. 강을 무사히 건넌 후 아이가 너무 대견하고 안쓰러워서 끌어안고 부부가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하네요. 그렇게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중국에서 가족이 숨어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1년 반 정도를 가슴 졸이며 중국에서 숨어 살았는데 그 사이 중국에 먼저 자리 잡고 살았던 처제가 한국행을 선택한 거죠. 그래서 민섭 씨네는 다시 한 번 처제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한국에 오면 식당일부터 요양보호사까지 여성들이 일자리 구하기는 비교적 쉬운데 남성들은 새롭게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하지만 김민섭 씨는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좀 낫지 않았을까요?

마순희: 네. 민섭 씨도 탄광기계공장에서 10여 년간 일을 했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곳으로 가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철소가 있는 공업도시인 포항을 거주지로 배정받았습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갖고 찾아온 포항이었지만 정착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 해 온 민섭 씨였기에 처음 해보는 건설 일용직이라도 최선을 다했고 그 성실성은 곧 주변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 중에는 그런 민섭 씨에게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여럿이었습니다. 그 중 한 동료가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냐며 조언을 해 주었고 용접기술을 배워주는 국비지원학원도 소개해 주었습니다. 북한에서부터 생산현장에서 못 해 본 일이 없었기에 민섭 씨는 어지간한 용접은 다 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고 하는데요.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용접기술을 배워보니 용접 용어부터 용접봉 재질에 이르기까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섭 씨는 힘들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배우는 기쁨이 더 컸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 덕분인지 민섭 씨는 남다른 열성으로 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증도 취득하고 취업까지 순조롭게 했습니다.

김인선: 사실 어려움은 그때부터가 시작일 거예요. 현장 일이라는 게 실습과는 다를 테니까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달아오른 철판 위에서 일하는 것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숨이 컥컥 막힐 정도로 온 몸에 땀이 흘러내린다고 하는데요.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둘까 생각해 본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가다듬고 버텼고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은 용접 분야에서는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는 용접기술자가 됐습니다.

김인선: 끊임없는 노력과 항상 배우는 자세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김민섭 씨가 전문가가 될 수 있었고 용접기술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용접기술자 김민섭 씨의 삶은 어떨까요? 다음 시간에 전해드릴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