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열심히 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 회사원 오정연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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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탈북민들의 정착지원을 해주는 남북하나재단에서는 2014년부터 정착경험사례 발표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요. 해마다 8월에 참가자를 모집하고 9월에 심사과정을 거쳐 본선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두 번의 예선을 거쳐 최종적으로 8명 정도가 선발되는데 지금 한창 서류심사를 하고 있는 시기더라고요.

마순희: 아, 그렇군요. 요즘 제가 하는 일이 바쁘다 보니 재단 홈페이지를 자주 보지 못 했는데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이전에 성공사례 발표대회에 갔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감동하고 배우는 유익한 시간이었는데요.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심사위원들 외에 하나원 교육생들 수십 명이 평가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같으면 이미 등수가 내정되어 있고 심사는 격식일 뿐인데 직접 대중의 의사에 의해 평가되는 일은 다들 처음 해 본 경험이었습니다. 저희 탈북민들끼리 ‘아~ 이런 게 진짜 민주주의’라고 감동하던 그 순간들이 제 기억 속에도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하나원 교육생들은 남한 사회의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선배들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되는데요. 발표자들이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퇴소한 이후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 참관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 됩니다. 남한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데요. 발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탈북민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가 없어졌고 인식이 달라졌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저희 성공시대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분들에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죠. 오늘은 어떤 주인공이 희망을 전해주실까요?

마순희: 네.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드릴 분은 올해 마흔 살 된 오정연 씨입니다. 2008년에 한국에 도착한 정연 씨는 지금 경기도의 한 회사에서 십년 넘게 장기 근속을 하면서 남편과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요. 한국에 오기 전까지의 삶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정연 씨의 아버지가 병환이 있으셔서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어린 정연 씨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맡았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책가방을 내려놓기 바쁘게 집안일은 물론이고 아버지 병수발까지 정연 씨 몫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집안에 화재사고까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화재 원인은 알 수 없었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살림살이마저 타버리면서 정연 씨 가족이 살아갈 방도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 밑천도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중국으로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연 씨 어머니는 정연 씨와 함께 며칠만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몸이 불편한 정연 씨 아버지를 위해 며칠간 드실 식량을 준비해 놓고 이웃집에 부탁을 한 뒤 정연 씨는 엄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때가 1998년, 정연 씨는 17살이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서 17살이면 대학입시 공부로 엄마, 아빠도 못 건드릴 정도로 짜증 부리고 유세 떠는 나이인데, 정연 씨는 너무 어린 나이에 생사를 건 길을 떠났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난의 행군시기에는 그렇게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았거든요. 학교는 고사하고 낟알 배낭을 지고 수 십리 길을 걸어 다니던가,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하는 여자애들도 많았고 남자애들은 산에 올라 나무를 찍어 땔감으로 만들어서 지게로 지고 장마당에 가는 애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학력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탈북민들 중에 나이 먹은 사람들은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이 대부분이지만 고난의 행군시기 학령기였던 청년들 중엔 고등중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연 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7살의 소녀는 어머니를 도와 가정살림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 대신 중국으로 먼 길을 향했습니다.

김인선: 힘든 일상일수록 가족은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죠.

마순희: 맞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지만 두 사람에겐 또 다른 고난이 닥쳤습니다. 사기꾼에게 속아 두 사람은 농촌에 팔려가게 됐던 것입니다. 힘든 농사일을 해야 했지만 정연 씨는 어머니가 곁에 있어서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숨어 살면서 몇 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의지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원망스럽게도 정연 씨에게 시련은 또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일하러 나가셨던 어머니가 공안당국에 잡혀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지금도 정연 씨는 어디 가서 알아 볼 곳도 없고, 불안하고 막막한 마음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그때가 가장 죽고 싶도록 힘들었다고 기억합니다.

혼자 남은 정연 씨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오직 어머니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소식은 알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 대부분이 북한으로 보내진다는 기막힌 소식만 들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여기 있으면 너도 어머니처럼 잡혀 갈 건데 차라리 한국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었습니다. 정연 씨는 21살 어린 나이에 먼 내륙지방에 팔려 가서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상대는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한족이었습니다. 오도 가도 못 하게 됐기에 정연 씨는 그곳에서 살게 되었고 죽어라 농사일만 했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한가한 시간이면 어머니 생각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생각에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하지 않은 결혼생활이었지만 정연 씨는 23세 되는 해에 딸을 출산했고 변함없이 몸이 축나도록 일을 했습니다.

김인선: 중국에서 아이를 낳고 한국에 정착한 탈북여성들이 나이 들면서 병원에 많이 가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잖아요. 정연 씨도 젊어서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마순희: 네. 젊었고 또 어렸기에 정연 씨는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에서부터 건강한 체력이 아니었지만 집안일을 돕고 아버지를 보필하던 정연 씨였습니다. 중국에 와서도 몸 돌볼 여유도 없이 육아와 함께 농사일도 하고 시장에 나가 채소도 팔고 두부도 직접 만들어 팔면서 몸이 망가질 정도로 일만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젊은 여자가 애를 낳고도 몸이 부서져라 움직이니 그들의 눈에도 안타깝게 보이고 동정심도 발동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정연 씨의 모습에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남편이었다면 정연 씨는 더 몸을 사리지 않고 생활했을 겁니다. 하지만 한족 남편은 젊은 아내가 언제 도망갈지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는지 점점 더 이상한 증세를 보였습니다. 폭력까지 휘두르는 모습에 정연 씨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섯 살 어린 딸을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한국에 가서 반드시 딸을 데리러 다시 중국에 오겠다는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김인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어린 딸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면서요?

마순희: 네. 그렇게 고대하던 어머니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북송된 정연 씨의 어머니가 한국행을 시도한 것도 아니고 생활고로 중국에 갔었다는 것이 인정되면서 어머니는 6개월 강제노동 생활을 마치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병환에 있었던 정연 씨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됐기에 정연 씨의 어머니는 혼자의 몸이 됐습니다. 중국생활을 경험한 사람들 누구나 그러하듯 정연 씨의 어머니도 며칠을 못 견디고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는 것이 정연 씨가 듣게 된 소식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중국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고 중국에서의 불안한 정연 씨의 신분으로는 마음 놓고 어머니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신분증을 받게 되고 당당하게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 정연 씨가 한국행을 결심했던 것이었습니다.

김인선: 제 생각에도 한국인 신분으로 어머니를 찾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기는 한데요. 정연 씨는 한국에 와서 어머니 소식을 접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