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투자는 기술에! 용접기술자 김영일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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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김영일 씨에 대한 이야기 계속 나눠 볼게요. 국기훈장 추서를 받을 정도로 일을 잘하던 김영일 씨는 출신 성분 때문에 국기훈장을 못 받게 되자 억울한 마음에 병이 생겼고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탈북을 했다고 했었죠.

마순희: 네. 김영일 씨 부모님 고향이 중국인데요. 고난의 행군으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어머니랑 형제들이 차례로 중국을 드나들었는데 그것을 문제 삼았답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선이 그어지는 현실을 직접 실감하게 됐고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고 하더라고요. 본인도 아니고 형제들이 먹고 살려고 중국에 다녀 온 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고 훈장 내신도 거부하는가 하는 반발심이 생겨났던 거죠. 마음의 상처가 심해서인지 병까지 걸리게 되자 친척이 있는 중국에 가기로 결심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당시 장마철이라 두만강이 불어 있었고 평소 30분이면 건널 곳을 8시간 걸려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친척들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으며 병은 나았지만 2년을 살아도 불법 체류자 신세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되니까 앞날을 위해서 한국행을 결심했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라오스, 태국을 거쳐서 2008년 3월에 한국으로 오게 됐답니다. 그때가 40대 중후반이었는데 그 나이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돈을 벌 생각에 잠시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었습니다.

김인선: 다단계라는 판매방식이 물건을 판매하기보다 사람을 끌어들여서 그 사람들에게 물건을 사게 하는 경우가 많죠. 처음엔 많이 버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게 빚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작하면 쉽게 그만 두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사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다단계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요. 하나원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가 자동차 판매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좋은 곳에 가자고 하면서 차를 가지고 왔더라고요. 일자리를 찾던 저는 돈도 벌 수 있다기에 따라갔는데요. 국내업체라 한국경제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유통단계를 줄여서 그 수익을 소비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몇 백 달러짜리 전기온열매트도 사고 전기밥가마, 손녀 기저귀까지 여러 가지를 샀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거였으니까 처음엔 몰랐는데 결과적으로 더 많은 물건을 사게 만드는 다단계였었다는 것을 몇 개월 후에야 알게 되었답니다. 그 후에는 아예 발길을 딱 끊어 버리게 되더라고요.

저처럼 김영일 씨도 다단계에 빠지게 되었다는데요. 영일 씨는 꽤 큰 손해를 보고 나서야 겨우 손을 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정착 초기의 탈북민들은 일을 시작할 때 무턱대고 혼자 결정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잘 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후 김영일 씨는 우연히 영일 씨 아내가 기술학원에서 수강자를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가져왔고 북한에서 용접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고민 없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게 됐습니다. 용어도 다르고 기술도 달라서 애를 먹기도 했지만 교육을 모두 마치고 두 달 간의 교육이 끝난 후엔 용접산업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 취직하게 됐습니다. 생산직이기는 했지만 북한에서 용접기능공으로 일했던 영일 씨가 일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김인선: 영일 씨가 북한에서 워낙 뛰어난 기술공으로 평가받았잖아요.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는 뭔가 크게 실력발휘를 하지 않았을까, 왠지 기대되는데요.

마순희: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 작은 회사라 실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없어져서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했답니다. 영일 씨가 새로 취직한 회사는 직원이 열두어 명 정도 되는 크지않은 회사였지만 일거리가 떨어질 염려도 없었고 더구나 사장님의 인품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사장님은 아무리 회사경영이 어려워도 한 번도 로임을 미룬 적도 없었고 만일의 경우에라도 퇴직금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은행에 자금을 예치해 두는 등 사원들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원들 모두가 한 가족처럼 서로 화합이 잘되고 어려워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그렇게 좋은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던 김영일 씨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고요?

마순희: 네, 맞아요. 폐암이라는 너무나도 뜻밖의 선고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영일 씨는 가끔 일하면서 감기증상처럼 아프기도 하고 기침이 나기도 했었지만 워낙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기에 감기려니 하고 크게 걱정하지 않고 일했답니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근무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건강검진을 하게 됐는데 그때 폐암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직장에 다니면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도록 해주고 있잖아요. 혈액검사부터 위, 간 등의 장기들의 기능을 검사하고 암 검진도 하는 등 다양하게 받게 되는데 사무직인 경우에는 2년에 한 번이고 공장에 근무하거나 건설업에 종사하는 경우에는 1년에 한번씩 반드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답니다. 원래 폐암은 사망율이 높고 완치가 어렵다는 병이지만 영일 씨는 조기에 발견됐기 때문에 수술 후 완치가 가능했고 6개월 뒤 다시 직장에 나갔습니다.

김인선: 그래도 암이었는데, 계속적인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엔 일보다 건강을 더 잘 챙겨야 하지 않나 싶은데 영일 씨는 6개월 만에 복귀를 했네요.

마순희: 네. 영일 씨는 집에서 안정치료를 받을 때에도 회사에서 일할 때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수술 후 몸이 조금 추슬러지자 가끔씩 회사에 나가기도 했다는데요. 물론 일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회사가 그리워서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일 씨는 6개월 휴직기간이 끝나자 곧장 회사에 복귀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건강관리도 신경 썼다는데요. 그동안 폐암으로 수술도 받고 항암치료까지 받으면서 건강의 소중함을 더 실감했으니까요. 30여 년 동안 즐겼던 담배도 끊고 건강을 위해 여가 시간에는 산책도, 간단한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일도 건강관리도 열심히 한 영일 씨는 주임과 대리를 거쳐서 지금은 차장으로 승진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평사원에서 대리와 주임을 거쳐 차장으로까지 회사의 주역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김영일 씨인데요. 더 올라갈 직급이 있나요?

마순희: 차장 위로 부장, 이사의 직함이 있긴 하지만 영일 씨는 앞으로 규모가 조금 작더라도 자신이 직접 회사를 설립해서 운영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습니다. ‘차장 김영일’이 아닌 ‘사장 김영일’을 꿈꾸는 거죠. 하지만 아직은 차장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만큼 영일 씨는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고 회사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쁜 것은 자신이 새로운 기술을 고안하고 그것을 생산에 적용할 때였다고 말하는 김영일 씨입니다. 늘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의 기능을 높여 나가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김영일 씨가 저에게는 거인처럼 대단해 보였습니다. 영일 씨의 아내와 아들도 한국에 잘 정착하고 있는데요. 아내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미화원으로 지금도 열심히 근무하고 있고요. 고등중학교를 다니다 탈북한 영일 씨의 아들도 한국에서 직업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세 식구의 모습을 후배 탈북민들이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기술을 배워서 회사에 잘 정착할 수 있게 됐다’는 김영일 씨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데요. 머지않아 회사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길 바래봅니다.

김인선: 인생에도 수업료가 있다고 합니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고 때로는 기약이 없는 인내를 해야 할 때도 있는데요. 세상엔 쉬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마주할 때 수업료 없이 공부한다고 생각해 봐야겠네요.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자기 인생에 빛나는 투자를 하고 있는 김영일 씨를 통해 또 하나 배워갑니다. 마순희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