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열심히 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 회사원 오정연 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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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정연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정연 씨는 2008년 27살의 나이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처음 정연 씨는 어머니와 함께 돈을 벌려고 중국으로 향한 거였죠?

마순희: 네. 정연 씨와 어머니는 며칠 간만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는 생각으로 1998년, 정연 씨가 17살 때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기꾼에게 속아 농촌에 팔려가게 됐습니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정연 씨와 어머니는 서로를 의지하고 지냈는데요. 어느 날 일하러 나갔던 정연 씨의 어머니가 공안당국에 잡혀가게 됐습니다. 주변에서는 엄마처럼 잡혀갈 수 있으니 한국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고 정연 씨는 그 말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중국에 왔을 때처럼 사기꾼의 속임수였습니다. 정연 씨는 21살 어린 나이에 먼 내륙지방의 한족에게 팔려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23살에 아이까지 출산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한가한 시간이면 어머니 생각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생각에 미칠 것 같아 정연 씨는 몸이 축나도록 일만 하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생활을 해도 정연 씨의 한족 남편은 정연 씨를 힘들게만 했습니다. 젊은 정연 씨가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가정폭력까지 서슴지 않았고 결국 정연 씨는 딸과의 생이별을 감수하면서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때마침 고대하던 어머니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생활고로 중국에 갔었다는 것이 인정되면서 6개월 강제노동 생활을 마치고 풀려났는데 며칠을 못 견디고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중국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고, 중국에서의 불안한 정연 씨의 신분으로는 마음 놓고 어머니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신분증을 받게 되고 당당하게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 정연 씨는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김인선: 정연 씨가 한국인 신분으로 어머니를 찾는 게 낫긴 했을 텐데요. 한국에 왔다고 바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우선은 정연 씨가 한국에 잘 정착해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니까요.

마순희: 맞아요. 그런데 중국과는 또 다른 정착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여느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정연 씨는 제3국을 거쳐 2008년 10월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친 뒤 받게 된 초기 정착금 대부분을 자신이 한국에 오기까지 도와준 브로커에게 지불하고 나니 생활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정착금 2,987달러(350만원) 중에 2,560달러(300만원)를 브로커에게 지불하고 427달러(50만원)로 3개월을 살아야 했거든요. 한국에서 1인 최소 생활비가 평균 512달러(60만원)라고 하는데요. 427달러로 석 달을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김인선: 브로커들이 탈북 비용 명목으로 초기 정착금 대부분을 가져가는 일이 빈번해서 한국정부에서는 지원금을 분할해서 지급하게 됐는데요. 정연 씨도 마찬가지였군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처음 한국에 정착하는 탈북민에게 초기정착금과 주거지원금까지 총 2천만원, 미화로 만7천 달러 정도가 지급되는데요. 먼저 탈북민이 거주지를 배정받고 하나원을 나올 때 현금으로 350만원, 3천 달러 정도의 돈을 받게 됩니다. 그 돈은 생활비와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데 사용되는데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탈북민에게 일부 가전제품과 생필품 등을 지원해 주기도 해서 대부분 전기세와 관리비 등 생활비로 사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정착금은 3개월 단위로 1년 동안 분할해서 지급받게 되는데요. 정착금은 말 그대로 탈북민이 스스로 남한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입니다. 최대 5년 동안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은 충분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부족하다는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정연 씨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지내는 것은 힘든 일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그런 것쯤은 고생도 아니라는 겁니다. 정연 씨는 그동안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지 못 했지만 한국에 와서는 오직 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면서 정연 씨는 한국생활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김인선: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3-40대 분들도 북한에서 못 다한 공부를 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27살의 정연 씨는 어떤 선택을 했나요?

마순희: 네. 정연 씨는 중국에 두고 온 딸과 소식을 알 수 없는 어머니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정연 씨는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식당 일이나 부업 같은 것보다는 제대로 공부해서 장기적으로 돈을 더 벌 수 있는 직업을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정연 씨는 북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 했기에 한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를 하고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컴퓨터를 다룰 수 있어야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컴퓨터 학원부터 다녔습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컴퓨터 용어들을 외우느라 밤을 새워 가며 열심히 배웠고 정연 씨는 세무회계 자격증을 취득하게 됐습니다. 경리업무자로 취업하는데 있어 최고의 자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정연 씨는 자격증 취득 후 사무직 일자리를 찾았고 지금까지 10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말이 사무직이지 생산현장 업무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현장업무는 물론 사무업무까지 해내면서 정연 씨는 스스로도 회사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연 씨에게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고단했던 중국생활에서 생긴 무릎 관절염이 심해졌고 부은 다리로 현장으로 다니는 것이 힘에 부쳤던 정연 씨는 결국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당신은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현장 업무가 힘들면 사무실 업무만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편의를 봐주는 사장님 덕분에 정연 씨는 지금까지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정연 씨가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온 보상을 받기 시작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게 다가 아니네요. 친정 엄마와 중국에 남겨졌던 아이까지 모두 데려왔다고요?

마순희: 네. 정연 씨는 한국정착 5년 만에 그렇게도 그리던 어머니도, 딸도 모두 한국으로 데려왔습니다. 어머니는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거주지인 전라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살고 계시는데요. 생활을 따로 하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정연 씨가 한국정착 2년이 되는 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일구었기 때문입니다. 정연 씨 어머니가 3대가 한 집에서 사는 것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해서 정연씨도 더 만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낳은 딸은 11살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데려왔는데 한족 동네에서 자라다 보니 한국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몰라서 정착이 쉽지 않았습니다. 정연 씨가 직접 우리말을 가르쳤고 제 나이보다 한 학년 내려서 한국의 일반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딸아이가 한국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됐다는데요.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딸이 어린 시절 정연 씨가 친정엄마에게 한 것처럼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 좋은 일은 정연 씨가 지금 임신 6개월 차가 됐다는 겁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연 씨기에 행복한 제2의 인생이 펼쳐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정연 씨가 지금처럼 행복하기를, 그리고 좋은 일만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인선: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죠? 정연 씨처럼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