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 몫, 간호사 정희선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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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일교차가 커서 면역력이 떨어지기 쉬운 날씨가 됐어요. 코로나비루스에 독감까지 유행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만큼 건강관리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데요. 번거롭더라도 겉옷을 챙겨서 밤낮 온도 변화에 대처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요.

마순희: 네,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요즘, 한낮은 여름 못지않게 무덥지만 아침 일찍 출근할 때에는 온 몸으로 찬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도 마스크를 하고 다니는 게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는데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는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김인선: 그러게요. 사실 그동안 의료현장에 계신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에게 마스크와 방호복은 피부를 짓무르게 하고 온몸에 땀띠를 나게 할 정도로 답답했을 텐데요. 그나마 서늘한 계절이 돼서 좀 낫지 않을까 싶어요.

마순희: 네. 그래서 요즘 더 의료계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데요. 오늘은 그 대열에 들어 있는 우리 탈북민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충남 천안시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35살 정희선 씨인데요. 희선 씨는 열아홉 살 때에 중국에 들어갔고 몇 개월 후 몽골을 거쳐서 2005년에 대한민국에 왔습니다. 올해 간호사로 일한 지 9년차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북한에선 전문 의학교육을 받지 않고도 간호사가 될 수 있다지만 남한에선 간호대학이나 간호학과 공부를 4년 동안 하고 국가고시를 거쳐서 자격증을 취득해야 간호사가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탈북민들에겐 더 어려운 공부가 아닐까 싶은데 간호사에 도전하는 탈북민들이 조금씩 늘어가는 거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탈북민들의 취업현황이나 실태조사자료 등을 보면 탈북학생들이 사회복지학, 경영학, 중국어학, 그리고 간호학을 선호하는 학과로 꼽더라고요. 간호학과의 경우 여학생들에게 특히 인기인데요. 아쉽게도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할 정희선 씨는 그 많지 않은 간호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간호학을 전공하는 탈북민이 많은 것에 비해 중도에 탈락하는 학생이 많은 것도 의사들과 똑같이 사용하는 의학용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정희선 씨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 최종적으로 간호사 자격증을 따냈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희선 씨는 무사히 학업도 마치고 자격증까지 취득했는데요. 뒤늦게 공부하는 경우보다 젊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정희선 씨가 한국에 왔을 때 나이가 19살이었거든요. 희선 씨의 경우 한국에 와서 바로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엔 취직을 했습니다. 언니들이랑 함께 왔었고 인도적 국제기구인 적십자사의 정착도우미 분들이 잘 해주셔서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다고 하는데요. 일자리를 찾는 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렵게 청바지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해서 재봉일을 배웠다는데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양복을 만드는 양복점이나 옷 공장 등에서 일하면 돈을 잘 벌기에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시는 것처럼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김인선: 경력이 많을수록 로임이 높아지니까요. 재봉일을 배우는 수준이라면 노동시간에 비해 벌이가 굉장히 적은 편이라 할 수 있거든요. 돈벌이가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라면 오래하기 힘들 거예요.

마순희: 네. 정희선 씨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재봉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희선 씨를 본 친언니들이, 나이도 어린데 앞으로 장래를 생각해서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고 희선 씨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지고등학교 야간학부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낮에는 24시간 운영하는 상점에서 일하거나 김밥집, 약국에서도 부업을 하면서 밤에는 야간학부에서 공부했다는데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희선 씨는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고등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왔어도 한국의 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게 쉽진 않았지만 새롭게 뭔가를 배우고 알게 되니까요. 희선 씨의 말로는 대학에 가서 그 어렵다는 간호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배우게 되면서 남북한 교육과정의 차이를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한 덕분이었다고 하는데요. 특히 영어과목을 열심히 배웠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간호대학에 가서 처음에는 교육수준이 너무 높아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더니 2년 정도 지나서부터는 따라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희선 씨는 힘들다는 대학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국가고시를 거쳐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당당하게 대학병원의 입원실 간호사로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탈북 학생들이 말하는 어려움 중에 하나가 남한 토박이들에 비해 학업에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더라고요. 보통 1시간 공부를 한다면 자신은 최소 3~4시간은 공부해야 겨우 따라갈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희선 씨처럼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과정까지 마치고 한국에 오면 공부하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나요?

마순희: 글쎄요. 희선 씨의 말을 빌린다면 그렇지 않다고 하네요. 북한에서 배웠던 교육과정을 모두 인정받는다면 남한에서 제 나이에 얼추 맞는 교육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당장은 시간적 여유도 있는 것 같고 좋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부족한 기초 때문에 오히려 학년을 낮춰서 다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북한에서의 학력을 인정받고 특례로 대학입학은 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학생활을 하자면 한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배우고 시작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희선 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고 언니들의 생각이기도 했기에 가족들의 지지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인선: 그래도 희선 씨는 상황이 나았나 보네요. 북한은 고등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제가 만나본 탈북민 중엔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가정형편 같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공부를 못 했다고 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셨거든요.

마순희: 네. 가정형편이 어려우면 공부를 할 수 없고 또 부모님과 함께 어릴 때부터 경제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희선 씨네 형편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외가켠으로 출신성분이 안 좋다고 해서 여러 가지 제약들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들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출신성분 때문에 좋은 혼처를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중국에 들어가서 돈이라도 벌겠다면서 두 언니는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희선 씨도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당시 문희 씨는 중학생 이었고 어디를 가든지 기본교육은 받아야 된다는 어머니의 만류로 따라 나설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희선 씨가 북한에서 고등중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겁니다.

김인선: 아 그럼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배정받았겠네요?

마순희: 그렇지 않았는데요.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대체로 열일곱 살이 되는데 그 나이가 되어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돼요. 그런데 희선 씨가 워낙 체격이 큰 편도 아니어서 생산현장에서 일을 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희선 씨는 철도학교에 가게 됐는데요. 그곳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한 후에 언니들이 살고 있는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중국에 있는 언니들이 주선해줘서 중국으로 들어가게 됐다는데요. 그때 희선 씨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먼저 자리 잡은 언니들이 있었지만 희선 씨는 중국에서 오래 살지 않고 몇 개월 지난 뒤 언니들과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김인선: 19살 정희선 씨는 뭔가 불안한 시간을 보낸 셈이네요. 북한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으니까요. 한국에서 시작한 희선 씨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갈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