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자! 봉사자 임미경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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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어떤 분이 한가위 추석 귀향은 고향집 마당에 앉아 빨간 고추를 다듬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지난해부터 코로나비루스 여파로 고향 방문을 자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올해는 백신 접종도 했고, 부모님 뵌 지 오래 됐다며 고향에 다녀왔다는 분들도 꽤 계시더라고요. 코로나로 인해 2년 가까이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마순희: 맞습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미리부터 열차표나 버스표를 예약하느라 분주하고 또 추석 연휴기간의 고속도로는 말 그대로 주차장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작년 추석부터는 그런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네요. 국립묘지나 추모관들에서는 온라인 추모 공간을 마련하고 또 성묘를 대행해 주는 서비스도 실시하고 있더라고요. 고향에 있는 부모님들과는 영상으로 만나고요. 우리 탈북민들은 두고 온 고향의 모습을 그렇게라도 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향은 늘 그립지만 명절이면 더 사무치게 느껴지기에 탈북민들은 이맘때면 더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분은 차라리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한국 정착 17년차 된 74세 임미경 씨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김인선: 명절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탈북민들이 정말 많으신데요. 임미경 씨도 가족분들이 다 북쪽에 계시다고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임미경 씨는 두 아들과 손자, 손녀들이 모두 북한에 있습니다. 함경북도 어랑 출신의 임미경 씨는 6. 25 전쟁 당시 부상을 입은 영예군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미경 씨의 아버지는 영예군인들을 교육하는 영예군인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했는데요. 1960년대에 인테리 혁명화로 하루아침에 토대가 달라졌습니다. 당시 혁명화 사업을 통해서 일제시대의 교육을 받은 인테리들을 모두 숙청했는데 미경 씨의 아버지도 강직되어 노동자로 일하게 된 것입니다. 신분이 달라진 미경 씨는 정규대학에도 못 가게 됐고 같은 노동자 출신의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갔지만 미경 씨에게 또 다른 고난이 닥쳤습니다. 바로 고난의 행군입니다. 미경 씨는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장마당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돈이 되는 물건이면 무엇이든지 시장에 내다 팔고 식량을 구입하는 주민들이 많았었죠. 이것도 저것도 없는 사람은 산으로 들로 나가서 나물을 캐서 동네 모퉁이에서 팔았으니까요. 미경 씨의 경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중국 사사여행자와 연계해서 물건을 주고받으며 거래를 했습니다. 식량과 생필품 등을 거래했는데요. 어느 날 상대방이 중국에 들어가서 연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미경 씨는 물건값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고, 절박한 마음으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때가 1998년 10월이었습니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찾아다니느라 미경 씨가 중국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1999년 3월, 북한에서 지방주권 대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물건 값을 받겠다는 생각 뿐이었던 미경 씨는 북한에 돌아가야 하는 시기를 놓쳤던 것입니다.

김인선: 북한에서는 선거에 불참하면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게 되고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처벌을 받게 되는데 선거에 불참하게 됐으니 미경 씨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마순희: 그렇죠. 심하면 총살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가족의 신변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미경 씨는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불안한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경 씨는 2003년에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는 한국에 가면 숨어 살지 않아도 되고 중국에서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려줬고 이후 미경 씨는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미경 씨는 중국에서 식당일을 하면서 모아두었던 돈으로 브로커 비용을 냈습니다. 그런데 브로커는 베트남 국경까지 데려다 주고는 무조건 영사관을 찾아가라고만 했다고 합니다. 미경 씨는 한글로 쓰인 간판이 보이면 무조건 뛰어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마침내 그들의 도움으로 탈북민을 수용하고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수용소에 가보니 수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서 미경 씨는 깜짝 놀랐었다는데요. 미경 씨를 비롯해 그곳에 모여 있던 탈북민이 모두 함께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2004년 7월, 468명이 두 차례에 걸쳐 특별비행기로 한국에 입국했다는 당시의 소식은 뉴스를 통해서도 보도가 됐을 정도였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당시 탈북민들이 늘고 있기는 했지만 수백 명이 집단으로 입국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니까요. 한국정부에서 동남아 국가에 장기 체류하고 있던 탈북민들을 데려오기 위해 두 달 전부터 극비로 계획을 추진했다고 하는데요. 이 일로 남북관계가 한동안 경색됐었습니다. 이런 대북관계에 대한 부담을 떠안고도 한국정부가 탈북민 집단 입국을 진행한 거죠. 그만큼 그분들이 한국정착을 잘 하셨으면 좋겠는데... 미경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사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제 주변을 보면 미경 씨를 비롯해서 당시 집단 입국한 여러 명 모두 각자 겪는 어려움은 있어도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도 탈북민들의 어려움을 알고 점차 탈북민 지원제도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정착도우미를 비롯해 담당 형사들까지 밀착해서 지금과 마찬가지로 탈북민들이 정착하는데 다양한 지원을 해주고 있고요. 그래서 미경 씨는 한국에 정착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입국할 때 임미경 씨의 나이가 57세이다 보니 스스로가 새롭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생은 60부터다’, ‘지금은 100세 시대’ 이런 말이 아주 흔합니다. 보통 직장생활을 60세까지 하지만, 100세까지 사는 요즘, 60살부터 새롭게 공부도 하고 자격증도 따서 제 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데요. 미경 씨는 한국에서의 제 2의 인생을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마순희: 처음에 미경 씨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살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미경 씨는 북한에서 한국의 방송통신대학 비슷한 원산경제대학 2년 과정을 통신으로 마치고 누구나 할 수 없는 통계업무를 보던 사무직 근로자였습니다. 비슷한 일을 한국에서도 하고 싶었지만 한국의 현실은 모든 것을 컴퓨터로 하는 세상이라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 기술은 어디에서도 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경 씨는 북한에서도 안 해봤던 노동일을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나무심기부터 건설현장 미장이나 도배, 보수를 받고 집안일을 해주는 파출부 등 미경 씨는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대부분 일한 만큼 하루 단위로 돈을 받는 일용직이었습니다. 일을 끝내고 난 후에 돈을 받는 형태이다 보니 때때로 일당을 받지 못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담당 형사님께 연락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미경 씨는 지금도 남한 정착의 어려운 순간마다 전화하면 언제나 달려와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담당 경찰관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 한다고 합니다.

김인선: 아무래도 탈북민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탈북민들의 신변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담당 경찰관들이 큰 힘이 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미경 씨의 정착생활이 고단하기만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임미경 씨의 정착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김인선, 에디터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