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정희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희선 씨는 올해 나이 35살로 충청남도에 있는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탈북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과 중의 하나가 간호학과지만 아직까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4년 동안 전문 과정을 공부하는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고시를 통해 면허증까지 취득해야 하는데 중도에 탈락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죠. 그런데 그 많지 않은 간호사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정희선 씨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쉽지 않은 길을 끝까지 갔고 간호사로 벌써 9년차가 됐는 걸요. 고등중학교까지 마치고 19살에 한국에 왔지만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해 남한의 교육과정을 알아가고 배웠던 것이 중도탈락하지 않고 간호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희선 씨는 말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영어과목이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배워나갔고 어려운 과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경험해 보았기에 대학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영어로 된 어려운 의학용어를 접하면서 부담감을 느끼는 탈북학생들이 많은데 그 과정을 고등학교 공부를 하면서 이미 경험했으니까요.
김인선: 19살이었지만 17살의 삶부터 시작한 정희선 씨. 당장은 2년이 뒤쳐진 것 같았겠지만 그 후로 낙오 없이 앞을 보고만 달릴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다른 탈북민보다 훨씬 앞서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희선 씨가 있기까지 먼저 한국에 정착한 언니들의 역할이 참 컸다면서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지금은 어머니도 한국에 오셔서 함께 살고 있지만 처음에는 두 언니들이 어머니 대신이었습니다. 자신들도 정착하기 쉽지 않았지만 언제나 관심은 어린 동생 희선 씨였다고 하는데요. 돈 버는 일보다 장래를 위해서 전문지식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 것도 역시 희선 씨의 언니였습니다. 희선 씨는 언니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으며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 시간만 되면 부업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학업을 선택한 탈북민에겐 등록금도 지원되고 최소 생활비도 지원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35세까지 가능하니까 희선 씨도 충분한 자격이 되는데 희선 씨는 왜 그렇게 열심히 생활비를 벌어야 했을까요?
마순희: 말씀하신 것처럼 만 35세까지는 대학등록금이 지원되고 대학생활기간에는 기초생활급여도 지급되기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등록금만 낸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교재나 참고서적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돈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또 생계급여는 가족 단위로 나오기 때문에 언니들과 함께 산 희선 씨의 경우 처음 정착하면서 그 생계급여로만 생활할 수 없었을 테고요. 그래서 비슷한 상황의 탈북민이라면 누구나 다 경제활동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부업으로 돈을 벌어본 사람들이 ‘중독’이라고 말할 정도로 오히려 쉬는 것이 더 불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왜 불안할까요?
마순희: 게을러지는 거 같고 괜히 노는 게 죄짓는 거 같아 조금만 시간이 나도 일을 하게 된다는 거죠. 힘들더라도 그렇게 돈을 벌어서 조금씩 저축하다보면 성취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정말 뿌듯하니까요. 제 손녀를 봐도 고등학교 때부터 양식당에서 부업을 했는데 지금 대학생이 되어서도 시간만 되면 직원처럼 일하러 나가곤 해요. 대학생활도 북한 대학처럼 매일 아침마다 대학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과목을 선택해서 계획에 따라 강의를 듣기 때문에 부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희선 씨 역시 그렇게 부업도 하면서 공부해서 단국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했답니다.
김인선: 남한에서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주위 친구들처럼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선택한 거였을 텐데요. 많은 직업 중에 왜 간호사였을까요?
마순희: 네. 희선 씨는 어릴 때부터 건강한 언니들에 비해 체격도 왜소하고 병원에도 자주 가는 편이었다고 하는데요. 약도 주고 주사도 놓는 간호사들의 모습이 두렵기도 했지만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출신성분 때문에 간호사가 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던 희선 씨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어떤 대학에나 갈 수 있잖아요? 희선 씨는 어릴 때부터 남몰래 동경해 왔던 간호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머니와 언니들도 찬성했다고 하는데요. 누구나 그렇듯이 집안에 의료인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을 겁니다. 동생을 지지하는 언니들은 어렵고 중도 포기가 많다는 간호학과를 어린 동생이 끝까지 마칠 수 있을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고 하는데요. 언니들의 걱정을 무색하게 할 만큼 희선 씨는 성실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해냈다고 합니다.
희선 씨는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도 정말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데요. 말투나 문화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조급한 생각은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갔던 것이 자신의 재능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말투가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보니 대학생활 하는 초반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고 회상합니다. 한국의 드라마나 인기 가수들 이야기를 할 때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말투도 표가 나는 것 같아서 못 들은 것처럼 아예 말을 안 했다고 하는데요. 그래도 2년 정도 지나니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게 되더라고 이야기하더군요. 대학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교우 관계보다 영어였었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희선 씨는 4년의 대학공부를 마쳤고 그 어렵다는 국가고시에도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자격증 취득 후 바로 대학병원에 취업해 간호사가 됐습니다.
김인선: 간호사라는 직업이 아이 낳고 병원 옮겨서도 오래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24시간 환자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하루 3교대를 하거든요. 그래서 시간도 들쭉날쭉이고 환자들을 상대하다 보면 사명감 없이 하기 힘들다고들 하거든요. 희선 씨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일하고 있을까요?
마순희: 모든 간호사들은 나이팅게일 선서를 통해 ‘환자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고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고 하더라고요. 업무량이 많아서 쉽지 않은 간호사 생활이지만 긍지와 보람을 안고 근무하고 있다는 희선 씨인데요. 응급실에 구급차에 실려 왔던 환자가 진료를 다 받고 완치되어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정년퇴직할 때까지 간호사 생활을 하고 싶다는 희선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직업에 대한 책임감과 긍지감, 전문지식을 소유하고 사랑과 봉사정신이 투철한 참다운 간호사의 모습을 보게 되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희선 씨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본인의 에너지를 돈 버는 것에만 두지 말라,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하면서 즐겁게 살자. 맞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 너무 힘들게만 살지 말고 사회를 위한 유익한, 그리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즐겁게 활기차게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즐기면서 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인선: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요. 순간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진로가 달라지니까요. 그런데요. 좋은 선택이었는데 결과가 꽝일 때도 있고, 나쁜 선택이었는데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때도 있잖아요? 결국 선택을 한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인데요.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자신의 선택이 빛나는 것 아닐까요?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감 있게 사는 정희선 씨의 삶이 빛나는 걸 보면 말이죠.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