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임미경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임미경 씨는 올해 74살로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을 보살피거나 돕는 일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미경 씨는 2004년에 있었던 탈북민 집단 입국 시기에 한국에 도착했으니까 올해로 한국정착 17년차가 됐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북한에서 아들 둘을 낳아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았던 미경 씨는 고난의 행군시절, 직장에 출근하는 것은 물론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미경 씨는 중국 사사여행자와 연계해 물건을 주고받으며 거래를 했는데 어느 날 이 중국 사사여행자가 물건은 받아 놓고 중국에 들어가서는 연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물건 값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경 씨는 1998년 10월에 두만강을 건넜는데 1999년 3월, 북한에서 지방주권 대의원 선거가 있는 날까지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결국 한국에 가면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식당 일을 하며 모았던 돈을 브로커 비용으로 내고 미경 씨는 2004년 베트남으로 가게 됐습니다. 같은 해 7월, 한국 정부가 동남아국가에 장기체류 중인 탈북민 468명을 집단 입국 시켰는데 임미경 씨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경 씨는 57살의 나이에 한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57살의 나이에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미경 씨의 경우 북한에서 했던 통계업무 사무직 같은 일을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그 일을 하려면 자격증이 있거나 관련학과를 졸업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미경 씨는 북한에서도 안 해본 노동일을 시작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미경 씨의 학력이나 경력, 기술로는 사무직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기본인데, 미경 씨는 컴퓨터가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경 씨는 일한 만큼 하루 단위로 돈을 받는 일용직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를 받고 집안일을 해주는 파출부부터 건설현장 미장이나 도배 등 미경 씨는 뭐든지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60대가 넘어서면서 도배나 미장 같은 현장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체력적으로 버거움을 느낀 미경 씨는 현장일 대신 거주지 관할 동사무소를 통해서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해서 여러 가지 도움을 드리는 일로 크게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대략 한 달 정도만 하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미경 씨가 맡은 어르신들은 중풍을 앓고 계셨기에 돌봐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잠깐 하려던 봉사활동이었지만 부모님 같다는 마음에 미경 씨는 차마 일을 그만두지 못 하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5년 넘게 그 일을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중풍 환자를 돌보려면 기본적으로 체력이 받쳐줘야 하는데요. 미경 씨의 경우 지병까지 있었잖아요?
마순희: 네, 미경 씨 자신도 왜소한 체격에 몸이 튼튼한 편이 아니라서 어르신들을 며칠 돌보고 나면 힘들어서 본인도 며칠 동안 쉬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미경 씨는 중학교 때에 기계체조를 하다가 철봉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는데 며칠 동안 치료받고 나아졌기에 살면서도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은 후 다쳤던 허리가 이제 와서 말썽을 부렸습니다. 나중엔 운신을 못 할 정도로 심각해져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고 회복을 했습니다. 다만, 조금만 피곤하거나 무리를 하게 되면 허리의 통증과 함께 때때로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경 씨는 자신의 경험으로 운신을 못 하는 분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잘 알기에 중풍으로 말을 못 하는 분들의 어려움까지 찾아서 돌봐 드리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서 명희 씨가 노인돌봄 서비스에 더 집중하신 것 같아요. 그래도 북한에 있는 두 아들과 소식은 전하면서 지낸다고 해서 다행이에요.
마순희: 네. 미경 씨의 두 아들은 일찍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고 큰 손자가 벌써 27살이 됐다고 합니다. 정착 초반엔 한 달에 2~3번씩 연락하면서 지냈는데 지금은 1년에 1~2번 정도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의 신변문제로 미경 씨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미경 씨는 한국에 유일한 피붙이인 여동생이 살고 있어서 외로움이 덜 하다고 말하더군요. 19살 나이 차이가 나는 자식과도 같은 막내 동생인데요. 미경 씨보다 5개월 빨리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남한에 와서 새롭게 가정을 이루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며 지냈습니다. 미경 씨는 노인돌봄 서비스를 하며 바쁘게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미경 씨도 더는 그 일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노인돌봄 서비스 일은 사회적 근로사업으로 보수가 따르기에 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청자들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경 씨 혼자만 계속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경 씨 뿐 아니라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정부에서 나오는 어르신 기초연금과 생계급여 등을 받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무리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경 씨는 ‘전기세나 가스비 등의 생활비는 절약하면 되고 사는 데 지장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복지관에도 다니고 여가활동도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요. 미경 씨는 때때로 동네 미화작업이나 혼자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고 있습니다.
김인선: 건강한 노후생활을 보내고 계시네요. 남한 전역에서 지역마다 어르신들의 건강한 삶을 위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데요. 남한 토박이들도 잘 몰라서 혜택을 못 받는 경우가 있는데 미경 씨는 이런 제도들도 잘 이용하신다면서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미경 씨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아픈 곳이 많아지고 또 젊어서 앓았던 지병들까지 도져서 가끔은 병원신세를 진다고 합니다. 병원비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경 씨 뿐 아니라 나이 드신 대부분의 탈북민들 경우, 의료급여1종 수급자로 병원 진료 대부분이 무료로 이뤄집니다. 가끔 본인부담금이라고 해서 일부 금액이 청구될 때가 있지만 탈북민들의 건강관리에 지원하기로 협약을 맺은 병원들에서는 본인부담금까지 80%-100% 정도 지원을 해줍니다. 그래서 거의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경 씨의 동생의 사례가 있습니다. 동생은 늘 가슴이 답답하고 통증을 느낀다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통증이 심해져서 병원을 찾았고 여러 가지 현대적인 의료기구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되는 큰 심장병이라고 했습니다. 수술비만 대략 8천 달러(1천만 원)라고 합니다. 이중 절반가량인 4천 달러 정도는 본인부담금으로 지불을 해야 하는데 탈북민의 경우 최대 80%까지 지원되기 때문에 1,600달러를 수술비로 내야했습니다. 그런데 국립의료원에 있는 탈북민 전담 상담사가 나서 심장재단에서 100%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줬고 미경 씨 동생은 무료로 심장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경 씨는 동생의 수술비를 100% 지원해준 심장재단에 대한 고마움이 너무 커서 동생에게 네가 살아있는 동안 매달 5만원씩 꾸준히 기부하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심장재단이 여러 사람들의 기부를 받아 어려운 사람에게 무상으로 심장수술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미경 씨의 말에 동생은 두말없이 수긍했고 지금도 꾸준히 기부하고 있습니다. 미경 씨 역시 다양한 봉사활동이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부를 한다고 말합니다. 봉사는 한국에 와서 받은 혜택에 대한 자그마한 기부라고 생각한다는 임미경 씨! 앞으로도 즐겁게, 건강하게 그리고 보람 있게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인선: 서로 돕고 살면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작은 노력이라도 시작한다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일조를 하는 거라고 알려주는 미경 씨네요.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김인선, 에디터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