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조금 서늘해지는가 싶더니 벌써 수확의 계절, 추석까지 왔습니다. 저는 해마다 추석이 되면 가족과 함께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를 되돌아보곤 했는데요. 올해는 코로나비루스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달력이 두 장 밖에 남질 않았어요.
마순희: 올해는 어느 해보다 더 빨리 지나간 거 같긴 해요. 사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은 더해지는데요. 얼마 전에 새로운 나이계산법을 듣고 무척 반가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기자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평균 수명이 그만큼 길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계산도 좀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 나이에 0.8을 곱하는 방식인데요. 예를 들어 60살이면 현대 나이는 48살에 해당한다는 거죠. 2020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3세. 이제 환갑은 노인으로 여기지도 않아요. 하지만 1970년만 해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61.9세였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맞아요. 그래서 당시뿐 아니라 90년대까지도.. 만으로 예순살이 되면 건강을 축하하며 자녀들이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열어드렸어요.
마순희: 네. 그런데 지금 60살은 노인 축에 끼지도 못 하죠. 지금 남한에서 60세가 넘으면 저도 그렇지만 많은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여유있게 원하던 일을 계획하거나 제 2의 인생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탈북민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성공시대에서도 많이 소개해 드린 것처럼 60이 넘어도 정규직으로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일하면서도 인터넷 상에서 진행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이버대학에서 혹은 야간대학에서 대학공부를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자영업을 하시는 사장님들의 경우엔 나이 60이 시작인 걸요. 제 주위만 살펴봐도 건강만 하시다면 70대라도 집에서 그냥 무료하게 지내시는 분들은 거의 없고 취미생활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거나 시간제로 일을 하면서 용돈벌이라도 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분들처럼 오늘의 주인공도 누구보다 멋진 노년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올해 나이 60세!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열에 넘쳐 살고 있는 사업가 김혜인 씨가 바로 성공시대 주인공입니다. 혜인 씨는 서울의 한 지역에서 재가요양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님이랍니다.
김인선: 탈북 여성들이, 특히 40대 후반의 중년 여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이 요양보호사라는 것이 성공시대를 통해서 명확하게 증명되는 것 같아요. 그동안 저희가 남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활동 중인 요양보호사들을 만나봤는데요. 김혜인 씨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혜인 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를 짧게 소개해 볼게요. 평양 출신으로 아버지가 국가기관에서 일을 하시다 보니 어린 시절에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남한에서 파견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잡혀가시는 바람에 생활이 180도로 변했습니다. 가족 모두 평양에서 추방되고 함경북도의 산간마을로 쫓겨 가면서 혜인 씨는 난생 처음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지만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늘 1등을 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어도 아버지가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대학에 갈 수 없었고 직장도, 결혼도 혜인 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간첩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늘 혜인 씨를 따라다녔으니까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정치범의 딸이라는 오명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병약했던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혜인 씨는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았는데요.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으로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13살 아들을 데리고 중국에 있는 먼 친척의 도움을 받기 위해 탈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친척집 주소 하나를 들고 중국말도 잘 모르면서 13살 아들을 데리고 찾아 떠날 때 혜인 씨 나이는 37세였습니다. 혜인 씨는 어린 아들의 존재가 마음에 큰 의지가 되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먹고 사는 문제도 있었겠지만 아들만큼은 정치범의 자손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겠다는 혜인 씨의 간절한 마음도 있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맞아요. 그래서 아이와 함께 북한 면적의 8배나 되는 흑룡강성 지방도시에 주소 하나를 들고 찾아가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혜인 씨는 천신만고하여 먼 친척집을 찾았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친척집도 두 식구에게 큰 도움을 줄 정도의 형편은 안 되었습니다. 결국 친척 소개로 마음씨 착한 조선족 남성을 만나 농사지으며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아시는 것처럼 조선족 남성과 살아도 중국이 안전한 곳은 못 되잖아요? 혜인 씨 역시 1년 정도 살던 어느 날 중국 공안에 잡혀서 북송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탈북민들이 다 그렇듯 혜인 씨는 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는데요. 하지만 더는 그 곳이 안전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혜인 씨는 2004년 중국을 떠나 한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당시 혜인 씨의 나이가 44살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임신한 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에 거주지에 정착하게 됐는데 그해 11월에 둘째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김인선: 하나원에서 사전 교육을 받았어도 막상 정착지로 나오면 교육받은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실제 생활에서 응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정착 초반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 탈북민들이 많은데 김혜인 씨는 만삭의 몸으로 큰 아들까지 돌봐야 했으니.. 한국정착 초반 생활이 더 힘겹게 느껴졌겠어요.
마순희: 글쎄요. 혜인 씨가 처음 하나원을 나와서 거주지를 선택한 곳이 강원도인데요. 아름다운 동해바다의 항구도시에서 첫 정착을 시작한 거라며 웃어보였는 걸요. 출산을 몇 개월 앞둔 임산부였기에 취직은 하지 않았지만 반면에 그 시간을 유용하게 보냈다고 회상하더라고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들도 하나하나 알아가고 특히 당시 21살이었던 큰 아들의 학교진학에도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요. 큰 아들은 중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했었기에 남편을 통해 졸업증을 받았다는데요. 다행히 학력인정을 받아 한국에서 바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진학문제는 해결됐지만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 조선족 남편의 거취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국제결혼 수속을 거쳐서 한국입국을 신청했지만 시일이 걸리다 보니 출산할 때에는 남편이 곁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남편은 곁에 없었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혜인 씨에겐 아들이 있었으니까요. 낯선 한국에서 고등학교생활 적응하느라 모든 것이 힘든 시기였을 텐데 아들은 어머니 곁을 지키며 효심을 다했다고 합니다. 혜인 씨는 그런 아들의 모습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김인선: 든든한 큰아들이네요. 큰아들 걱정은 좀 덜 해도 될 거 같은데, 사실 탈북 자체가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 될 정도로 큰일이잖아요.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국에 오자마자 아이부터 출산했으니 미역국 끓여줄 사람도 없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 했겠어요.
마순희: 몸조리라는 걸 우리는 잘 몰라요. 한국에선 출산한 다음에 한약을 지어먹거나 몸의 붓기를 빼기 위해서 호박을 달여서 먹기도 하던데 북한에서는 생계 문제 때문에 빨리 바깥으로 나와서 일을 해야 하거든요. 혜인 씨도 그런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보니 한국에 왔다 해도 몸조리는 생각도 안 했던 것 같습니다. 몸조리보다 한국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나 할까요?
김인선: 혜인 씨는 몸조리를 하는 대신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 가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