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 주 만에 뵙는 건데, 달이 바뀌었어요. 9월엔 태풍에 아프리카돼지열병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특히 농가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탈북민 중에서도 농사일 하시는 분들이 꽤 많으신데 어떠신가요?
마순희: 네,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있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다행이라고 표현을 해도 될까요? 제가 취재한 분들 중에는 돼지를 키우는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포도농장이나 복숭아 농장 등 과수원을 하시는 탈북민들은 많으세요. 아프리카돼지열병과는 무관하지만 지난달 강한 태풍도 있었기에 몇 분에게 안부전화를 해봤는데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중의 한 분인 강원도 철원에서 오리목장을 하고 있는 김민정 대표를 소개해드릴게요.
김인선: 그럼 오늘의 주인공 김민정 씨는 오리를 기르시겠네요? 오리엄마, 김민정 씨라고 소개해도 되겠어요.
마순희: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염소엄마라고도 동시에 말해야 될 것 같네요. 김민정 씨가 처음에는 오리목장으로 시작했지만 변수가 많은 오리보다는 염소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점차 염소도 기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리엄마이자 염소엄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인선: 네. 어떤 계기로 민정 씨는 오리와 염소엄마가 됐나요?
마순희: 네. 처음 한국에 와서 민정 씨는 일용직으로 화분을 옮겨 심는 곳에서 일했다고 해요. 그때부터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시작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이 강원도에서 오리목장을 하고 있는데 함께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의를 해왔고, 농촌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던 민정 씨는 그 달음으로 달려가 공동명의로 오리목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손이 많이 가고 변수가 많은 오리보다 자연 속에서 키울 수 있는 염소를 키워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염소도 함께 키우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염소는 고기와 가죽, 우유까지 얻을 수 있어서 북한에서도 사육을 권장하고 있는 가축이잖아요. 김민정 씨도 북쪽에서 염소사육을 해 보셨나 보네요.
마순희: 아니요. 민정 씨는 북한에서는 중소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살아가기 어려워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게 되었는데요. 장사를 하면서 중국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한국과 연계된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살고 있는 탈북민과 북한 가족들의 소식통이 되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탈북을 돕는 일까지 하게 됐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 북송된 사람들 입에서 민정 씨의 이름이 나오게 됐고 민정 씨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탈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빨리 한국에 가고 싶어도 위험한 길을 가족이 다 함께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딸을 먼저 보냈고, 딸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다음에는 남편, 그리고 남아있던 딸들을 차례로 한국에 보냈습니다. 가족이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안 후에야 민정 씨는 2005년에 마지막으로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데요. 그래도 먼저 도착한 가족들이 돈을 보내줘서 멀고 험난한 3국을 통하지 않고 위조여권을 발급받아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한국까지는 다른 탈북민들에 비해 편하게 왔지만 살아가는 과정은 여느 탈북민과 다를 바 없었다는데요. 다만 적응이 될수록 농촌에 가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점점 더 커졌다고 합니다.
김인선: 북한에선 중소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했다는 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마순희: 북한에서는 중학교 때 농촌동원부터 시작해서 직장에 다닐 때에도 농촌지원을 많이 하니까요. 게다가 민정 씨는 산이 많은 무산 출신이다 보니까 어린 시절에 농사짓고 짐승을 키우는 것을 늘 접하기도 했습니다. 익숙하게 여겨진다고 할까요? 그래서 김민정 씨는 한국에 와서 일용직을 하다가 농촌에서 오리사육을 함께 하자는 지인의 요구를 즉석에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김민정 씨는 일용직을 하면서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자금을 탈탈 털어서 오리목장 동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가족이랑 동업을 해도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데 고향 지인과의 동업은 어땠을까요?
마순희: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업이 안정을 찾고 수익이 발생하면서부터 힘든 일이 생겼다고 하는데요. 민정 씨는 타고난 성실성과 적극성을 가지고 오리목장의 모든 일을 억척같이 해 나갔는데 함께 동업을 한 지인은 손님들이라도 찾아오면 자기 목장이라고 양복을 쭉 빼 입고 나서기 일쑤였고 민정 씨를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취급을 하더랍니다. 그뿐 아니라 몇 번의 오리사육 실패를 경험하면서 부도 위기에 빠졌고 결국엔 둘 사이에 긴 법적 공방까지 오가게 되었습니다. 남한의 경제적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시작한 사업은 결국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김인선: 많이 속상하셨겠네요. 그래도 병원생활을 오래하면 반 의사가 되고요. 법정 소송을 오래하면 반 법조인이 되거든요. 좋게 보면 김민정 씨도 이젠 법적으로 손해 볼 일은 없겠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김민정 씨도 몇 년간 이어진 소송으로 남한사회와 법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사실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어려운 점들이 적지 않은데요. 그 중에서도 법에 대해 무지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자영업을 하거나 농촌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관련법을 잘 알아야 손해를 안 보거나 피해를 안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장사나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잘 모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되는데요. 그러다 보면 본인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물론 본인이 본의 아니게 범법자가 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김인선: 그건 탈북민 뿐 아니라 남한 사람들도 마찬가진데요. 남북의 제도가 달라서 탈북민이 피해를 보는 경우는 있을 것 같아요.
마순희: 네, 그렇더라고요. 저만 하더라도 그런 경험이 있답니다. 북한에서는 위수구역이 아니면 어디나 아무 산에서나 산나물을 뜯거나 산열매를 채취해도 아무 단속이 없거든요. 그래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에는 가을에 친구들이랑 밤을 주우러 갔는데 산 임자가 나타나서 밤을 주우면 안 된다고 해서 어리둥절한 적도 있었거든요. 산 임자의 허락없이 들어갔으니 무단침입죄도 성립될 수 있고 말없이 밤을 가져왔으니 절도범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겪는 법적인 문제도 있는데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경우는 더 할 겁니다. 김민정 씨도 법정 소송에 휘말리면서 법원에 가는 일이 많아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유용한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법원을 오가면서 알게 된 정보 덕분에 경매로 싸게 나온 강원도 철원에 있는 오리목장을 인수해서 지금까지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그래서 최북단, 철원에 자리를 잡은 거로군요.
마순희: 네, 사실 민정 씨의 거주지는 서울입니다. 그런데 오리목장이 철원에 있다 보니 거의 철원에서 생활하고 서울에 있는 집에는 가끔 들린다고 하네요. 철원의 자연이 어찌 보면 자신의 고향인 함경북도의 산간지대와 흡사해서 가끔은 내가 지금 대한민국에 온 것이 맞는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합니다.
김인선: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곳이 고향이라고 하잖아요. 도시의 모습은 다를지 모르지만 자연의모습은 남한과 북한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민정 씨에게 철원은 제2의 고향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녀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마순희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