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김혜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평양 출신의 혜인 씨는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잡혀가면서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됐다고 하는데요. 함경북도의 산간마을로 쫓겨나 살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망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당시 13살 된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향하게 됐는데요. 중국에 있던 친척 소개로 조선족 남성을 만나 함께 살게 됐습니다. 하지만 북송 뒤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고 2004년 한국에 정착합니다. 올해로 한국에 정착한지 17년이 됐는데요. 혜인 씨의 한국 정착나이랑 똑같은 17살 된 둘째 아이가 있잖아요?
마순희: 네. 한국 입국 당시 혜인 씨의 나이가 44살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혜인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에 거주지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해 11월에 둘째 아들을 출산했답니다. 아이의 아빠, 조선족 남편과는 국제결혼 수속을 거쳐서 한국입국을 신청했지만 시일이 걸리는 바람에 둘째 아이를 출산할 당시 남편은 곁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편 대신 큰 아들이 혜인 씨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다고 해요.
한국에선 큰 병원이나 산부인과에서 출산에 관한 모든 것을 도와주기에 남편 없이도 큰 문제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요. 다양한 의료장비를 통해 노산인 혜인 씨의 건강상태는 물론이고, 내장기관을 촬영할 수 있는 초음파 촬영으로 뱃속에 있는 아이의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산 전부터 출산 직후까지 제공되는 병원진료는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거든요. 우리 탈북민들에게 한국의 의료혜택은 정말 크게 와 닿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북한여성들도 안전하고 좋은 환경에서 출산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됩니다.
김인선: 맞는 말씀이십니다. 출산에 이어 몸조리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한국에선 출산 후 두세 달은 몸조리를 하면서 한약을 지어먹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김혜인 씨는 둘째 아이를 낳고 몸조리 말고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썼다고요?
마순희: 네. 무사히 출산한 혜인 씨는 3개월 정도 집에서 쉬는 것으로 몸조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혜인 씨는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한국생활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운전면허증 취득에 도전했습니다. 취업하기 전에 허송세월하지 않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해 놓는 것이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거죠. 하지만 운전경력은 고사하고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본 기억도 없는 혜인 씨에게 면허증 취득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혜인 씨였기에 이론시험은 첫 시험에 바로 합격했는데 문제는 실기, 실제 운전 실력이었습니다. 주차하기부터 언덕길 운전 등등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혜인 씨는 몇 번의 도전 끝에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운전면허증 취득으로 자신감이 생긴 혜인 씨는 대학입학까지 도전했다고 하는데요. 늦은 나이였어도 영동대학교에 입학해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김인선: 44살에 출산을 하고, 늦은 나이에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면서 대학교까지.. 늦깎이라는 게 말이 쉽지 젊은이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잖아요.
마순희: 네. 육아를 하면서 대학공부까지 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지만 혜인 씨는 그 시간들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무엇보다도 아침이면 어린이집에 아들을 맡기고 학교에 가는데 유치원 버스가 집 앞까지 와서 아이를 태워가지고 데려가는 게 신기하면서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뒤에 자신은 대학교에 간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남들이 어렵다는 대학공부도 힘든 줄 모르고 했던 것 같다고 혜인 씨가 말했는데요. 오죽하면 이게 진짜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손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다고 하면서 웃더라고요. 그런데 혜인 씨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지 4년 만인 2008년에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삼육보건대학에 입학했는데요. 아들을 서울에서 혼자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혜인 씨 본인도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을 하고 거주지를 서울로 옮기게 된 거죠. 아들과 함께 대학생활을 해 나간 것이 힘이 됐는지 혜인 씨는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일자리 찾기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신문에 난 탈북민 요양보호사의 성공적인 정착 이야기를 접하게 됐고 혜인 씨는 무작정 그 성공 사례자를 찾아 갔다고 합니다.
김인선: 혜인 씨만 봐도 탈북민의 성공사례가 같은 탈북민들에겐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 혜인 씨 얘기를 들은 청취자 여러분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면 더 뿌듯하시겠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우리 성공시대 사례자들만 봐도 성공적인 정착을 했다는 분을 찾아가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니까요. 음성이나 진도에서 오리목장을 하시는 분들도 그렇게 직접 찾아가서 일하면서 배워서 자신의 사업을 했고 횡성 고사리 농원의 대표님도 역시 고사리농원에서 일해 주면서 기술도 익히고 경험도 쌓고 자신의 사업을 해 나갔던 거잖아요? 특히 혜인 씨의 경우엔 무조건 부딪쳐 보는 성격이라 그냥 무작정 찾아갔다고 합니다. 신문기사의 주인공 역시 먼저 시작한 선배답게 혜인 씨에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운영하면서 제기되는 일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답니다. 혜인 씨는 그곳에서 8일 동안 먹고 자면서 일을 배웠고 자신도 능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 시설을 설립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혜인 씨의 추진력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결단력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8일 만에 시설을 설립하겠다고 결정한 혜인 씨, 저부터도 말려야 하지 않나 싶은데 가족들이 반대하지는 않았나요?
마순희: 웬걸요. 엄마가 하는 일이라면 항상 응원하는 아들도 찬성했고 한국에 와서 함께 살고 있던 남편도 함께 동참하기로 했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임대료가 싼 지하에서 자그마한 사무실을 내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실 방문요양시설을 운영하려면 본인의 자격 정도가 완비되면 다른 사업에 비해 큰 밑천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혜인 씨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했었기에 설립여건이 충분했고 또 남편도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그만한 정도의 재정적 여력은 있었다고 봐야죠. ‘작게 시작해서 크게 키워라’ 라는 것이 탈북민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하는 혜인 씨의 이야기에서 혜인 씨의 사업적인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인선: 뭔가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요즘 노인 인구가 늘어나서 요양시설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거란 전망이 나오고 있잖아요. 참 탁월한 판단력이 아닌가 싶은데요. 계획을 실현한 지 10년 된 지금! 규모도 꽤 커졌겠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지금은 40여 명의 직원들과 돌보심을 받는 어르신들도 60여 명이나 되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 있는 건물의 지하에서 자그마한 사무실을 내고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목욕차량까지 갖춘 방문요양 및 방문목욕센터로 발전한 거죠. 지금은 보건대학을 졸업한 큰 아들이 함께 센터운영을 돕고 있다고 하는데요. 혜인 씨의 사업이 앞으로도 더 창창하게 발전해 나가기를 바래봅니다.
김인선: 김혜인 씨의 올해 나이 60. 100세 시대에 맞는 요즘 나이 계산법으로 하면 48살밖에 안 되는데요. 지금부터가 바로 인생 2모작이 시작되는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춘은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에서 온다고 하니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