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 사랑, 요양보호사 김희경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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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요양보호사 김희경 씨에 대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희경 씨는 재가요양보호사로, 그러니까 거동이 불편해서 돌봄이 필요한 대상자의 집으로 가서 건강관리부터 위생관리까지 다양한 일을 하는 분입니다.

마순희: 네. 한국에 와서 김희경 씨는 처음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평양제사공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닐 정도로 열심히 살아왔던 모범 노동자였는데요. 1998년 고난의 행군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열다섯 살 딸과 함께 고향인 청진을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숨어 살다가 2002년에 중국공안에 잡혀 북송됐다고 하는데요. 1년간 악명 높은 오로수용소에서 지낸 후 다시 탈북해 2012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1년간 간호조무사 자격시험을 준비한 뒤 요양보호기관에서 일하게 됐는데 딸과 손자가 한국에 오면서 시간이 좀 더 자유로운 재가요양보호사로 근무를 하게 됐고 지금까지 7년 차 꾸준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김인선: 간호조무사와 재가요양보호사, 다시 한번 설명을 해 주세요.

마순희: 네, 헷갈릴 수도 있는데 간호조무사와 요양보호사 자격은 같은 국가 자격증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간호조무사는 국가시험원에서 시행하는 거라 보건복지부 장관의 자격인정을 받는 것이고 요양보호사는 요양보호사 학원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고 각 시, 도지사가 교부하는 자격증을 받는 것입니다. 둘 다 필기와 실기를 합쳐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을 하는데요. 김희경 씨의 경우에는 간호조무사와 요양보호사 두가지 모두 취득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보통 자격증 준비하면서 어려운 용어 때문에 힘들어 하는데요. 김희경 씨가 힘들어 했던 건 조금 다르다던데, 무슨 말이죠?

마순희: 물론 희경 씨도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의료기기나 학술적인 어려운 용어 때문에 힘들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또 한국사회에 대해 알아가는 계기가 되어서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강에 이상신호가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 와서 다 잊어버린 줄 알았었는데 북송되어 가면서 열차로 묶여서 후송되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면서 몸에 이상을 느낀 겁니다. 자격증 공부를 하러 가면서 버스에서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게 됐는데, 북송 당시의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면서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었고 그후부터는 버스만 보면 항상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한 생각에 잠길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병원에 갔더니 그런 증상을 ‘폐소공포증’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상담도 해주고 약도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 후 생활이 안정되면서 점차 증상이 나아졌지만 처음에는 폐소공포증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희경 씨처럼 심리적인 고통을 겪는 탈북민들이 많으시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대부분이 북한을 탈출하면서 한국으로 오는 동안 체포와 북송을 직접 겪거나 그 위험을 늘 감수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게 되거든요. 그래서 탈북민들의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이 실시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본인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경 씨 역시 북한에 잡혀 나갔을 때 수용소에서의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만 사랑하는 딸을 생각해서 그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을 이겨 나갔다고 합니다. 2년형을 받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마침 대사령(사면령)으로 나오게 된 희경 씨는 몸이 조금 추서자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데요. 악몽같은 그 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살겠다고 했고 또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 기억들이 후유증으로 남아 다시 희경 씨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희경 씨는 항상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노력했고 봉사활동에도 참가하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돌보면서 점차 자신감을 회복하고 당시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통을 경험한 희경 씨니까 돌봄 대상자들의 마음까지 살뜰하게 살피지 않았을까 싶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처음 희경 씨는 요양시설에서 근무했는데요. 언제나 말없이 환자들에게 정성을 다 하는 희경 씨를 동료들도, 환자들도 모두 좋아해주었습니다. 원래 천성이 착하고 성실한 희경 씨에게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절대로 외면하지 못 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엿볼 수도 있었는데요.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면 거주지를 선택하는데 거의가 서울에 살고 싶어하거든요. 저희 때에도 서울은 배정된 주택수보다 희망자가 많아서 제비뽑기로 선정하기도 했었는데요. 희경 씨는 운 좋게도 선택했던 서울에 주택을 배정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거주지를 동료에게 양보했다고 해요. 한 기에 나오던 동료가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아들을 교육시키는데 필요하다고 하기에 자신이 받은 서울과 그 동료가 받은 강원도 춘천으로 거주지를 바꾸어서 지금까지 춘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인선: 많은 분들이 서울에 집을 배정받고 싶어 하잖아요. 특히 자녀교육 문제 때문에요.

마순희: 맞습니다. 그런데 희경 씨는 안타까워하는 동료를 위해 기꺼이 양보한 거죠. 뒤늦게 한국에 온 딸과 손자를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춘천이 서울보다 더 살기 좋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은 아파트 단지 내에 공원이 다 있기는 하지만 워낙 땅값이 비싸서인지 녹지가 그렇게 넓은 축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춘천에 가니까 주차공간도, 녹지도 넓어서 마치 공원 속에 도시가 있다는 느낌이더라고요. 그리고 처음 희경 씨가 뒤늦게 데려온 딸과 손주를 봐주기 위해 시설에 근무하는 것을 포기하고 재가요양보호사로 근무했다고 했는데 거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의 학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기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을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딸은 이 좋은 대한민국에 와서 마음껏 배우고 꼭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딸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손주를 자신이 돌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희경 씨의 뒷바라지 덕분에 희경 씨의 딸은 검정고시를 거쳐 세무회계 자격증도 취득하고 인터넷으로 수업을 듣는 사이버대학교에서 대학까지 졸업했다는데요. 지금은 춘천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인선: 요즘은 어르신들도 일을 하거나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종교활동도 하시면서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손자, 손녀 돌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점점 줄고 있는데 희경 씨는 딸을 위해 뒷바라지를 제대로 했군요.

마순희: 맞습니다. 희경 씨는 엄마로서 무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손주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일자리까지 바꾸어 가면서 헌신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전화하면서 이제는 희경 씨의 나이도 60대 중반이기에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집에 있으면 뭐하냐고 힘들기는 해도 힘에 부칠 정도는 아니라면서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또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 이런 좋은 일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언제까지라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김희경 씨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한 것도 있지만 탈북민 거주지 정착지원기관인 하나센터나 전문상담사 등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많이 참여했던 것이 북송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던 것 같은데요. 인생 2막을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김희경 씨가 앞으로도 딸, 손주들과 함께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인선: 과거에 경험했던 위기, 공포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마음을 겪는 것을 ‘트라우마’라고 하는데요. 이 마음의 병은 회피하지 않고 맞서야 나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탈북하신 분들 중에 이런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많다고 하는데요. 희경 씨처럼 멋지게 극복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