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행복지수, 청소미화원 전인숙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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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며칠 전(10월25일) 이런 기사가 있었어요. 대구 달서구에서 환경미화원을 채용하는데 원서접수 결과 7명 모집에 187명이 지원했다는 내용인데요. 경쟁률이 26:1이 넘었다는 거죠. 환경미화원이 예전에는 쓰레기를 치우고 거리를 청소하는 직업이라 허드렛일로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요즘엔 공무원이라는 안정성 덕분에 인기가 높더라고요. 탈북민들 중에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어때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공무원은 북한으로 따지면 정무원과 역할은 비슷한데 남한에선 철밥통으로 여겨질 만큼 한 번 공무원이 되면 월급도 따박따박 오르고 60세까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서 인기가 높은 직업군이죠. 탈북민들에게도 마찬가지고요. 공무원인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50-60대가 넘은 여성 탈북민들 중에는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아파트 미화원으로 근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나이가 들은 후에 한국에 입국하다 보니 특별한 기술을 배우기도 그렇고 정규 회사에 취직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여성분들 중에는 청소미화원이나 환자를 돌보는 요양보호사, 아니면 간병인, 그리고 남성분들인 경우에는 일용직이나 경비업체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 주변에도 많은 분들이 미화원으로 일을 하고 계셔요. 환경미화일도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같은 곳에서 일하려면 서류전형이나 체력검사도 있고 또 면접시험까지 거쳐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파트 단지들이나 상가 등에서 미화원으로 일하는 데는 비교적 쉽게 취업을 할 수 있거든요. 게다가 본인만 건강하고 성실하다면 정년이 따로 없이 70대가 넘어서도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고 또 일하는 데도 큰 무리가 없다고들 하더라고요.

김인선: 맞아요. 그러고 보니 성공시대 주인공 중에도 고령의 나이지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일하신다는 미화원 부부가 계셨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분들로 벌써 2년 전에 소개해드렸더라고요. 70대인 지금도 두 분 다 건강하게 일하고 계신답니다. 그분들 외에도 제가 아는 많은 분들이 곳곳에서 미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대부분 연령대가 있는 편이에요. 물론 제가 아는 젊은 탈북여성들 중에도 맞벌이를 하고 싶은 경우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다고 볼 수 있는 미화원 일을 택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고령자로 체력검정이 필요 없는 곳에서 미화원으로 계시는데요. 오늘 성공 사례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69살인 전인숙 씨인데요. 2007년 하나원을 나온 지 6개월 후부터 지금까지 미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분이랍니다.

김인선: 상당수의 탈북민들이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취업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는 일이더라고요. 생활비, 교통비, 식비까지 다 주니까 안 배울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런데 전인숙 씨는 금세 취업을 했네요.

마순희: 네, 하나원을 나올 때 전인숙 씨의 나이가 57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나이에 기약 없이 취업준비를 하고 회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취업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인숙 씨가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어르신들을 돌보는 요양시설인 실버타운에 견학을 갔었는데 그때 자신의 노후에 대해서 생각이 들었다는데요. 대한민국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숙 씨는 자신의 건강상태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아파트 청소 미화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1년 넘게 아파트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다가 지하철 9호선이 새로 생기게 된 2009년부터 지금까지는 지하철 역사에서 미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참 대단하다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인숙 씨는 밤 근무라 밤 10시부터 일하고 새벽 5시에 첫 차를 타고 퇴근한다고 하는데요. 중간에 휴게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6시간 정도 근무합니다. 업무는 화장실 청소를 비롯해 지하철 개찰구 주변 청소까지 전반적인 청결을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탈북민들에겐 아무래도 적응기간이 필요해서 한 직장에 그렇게 오래 다니는 분들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11년간 한 직장에서 일하면서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고 계시다니 그 성실성은 정말 인정해줘야 할 거 같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인숙 씨는 한국에 정착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를 ‘성실성’ 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분입니다. 누군가는 ‘성실’을 누구나 내세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인숙 씨가 성실성을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을 갖는 것은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인숙 씨는 북한에서는 일러주는 대학인 김형직 사범대학을 졸업한 잘 나가던 엘리트(인테리)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해서도 군관가족으로 10여 년간 큰 근심 걱정 없이 잘 살아왔었던 분이거든요.

김인선: 군관가족이었다면 북한에서 지내면서 힘든 일 한번 안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마순희: 탈북민들이 겪은 큰일은 고난의 행군, 먹고사는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저마다 다르겠지요. 전인숙 씨의 경우 10여 년간 군관가족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는데요. 남편이 제대하자 함께 함경북도의 한 지방 도시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제대한 남편을 따라 지방에서 생활하면서도 군 행정위원회 산하의 봉사관리소 소장을 지낼 정도로 괜찮게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고난의 행군시기에 남편이 사망한 후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지만 다행히 중국에 친척들이 살고 있었기에 친척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았는데요. 그래도 도움을 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도움만 바라고 살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촌동생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도 한몫을 했는데요. 연변에서 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사촌동생이 자주 집에 친척 방문으로 왔었는데 그 동생을 통해서 중국의 생활형편과 한국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촌동생의 주선으로 인숙 씨는 당시 25살이었던 딸과 함께 2006년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한국행을 위해 숨어 살다가 두 달 만에 한국행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숙 씨는 2007년에 대한민국에 입국해 지금까지 열심히 잘 살고 있답니다. 인숙 씨에겐 아들도 있는데요. 군사복무 중이어서 함께 한국에 오지 못했습니다.

김인선: 그럼 아들과는 소식이 끊긴 거예요?

마순희: 아니요. 10년 군사복무를 마치고 제대된 아들은 집에 왔더니 식구들이 모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무작정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북한의 현실이 얼마나 변화했는지 10년 전 자신이 군대에 나가기 이전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려서 미련도 없었고 지체하고 싶지도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됐다고 하는데요. 인숙 씨 아들은 3개월의 강제노동을 마친 후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고 그동안 한국에 먼저 도착한 어머니와 연락이 되어 뒤따라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정말 다행입니다. 북한에서 인테리였던 인숙 씨가 성실하게 청소를 열심히 할 수 있었던 힘이 아마 가족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잘 나가기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지 못 하는 분들도 계신데요. 인숙 씨는 어땠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