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예전엔 서리가 내릴 무렵이나 돼야 김장을 담갔는데요. 요즘은 11월이 되자마자 바로 김장을 시작하더라고요. 얼마 전(11월1일~3일) 서울에서는 ‘김장문화제’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외국인들이 김장을 해보는 체험도 해보고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마순희: 네, 남한에서는 김장도 축제라고 큰 행사로 함께 즐기면서 김장을 하더군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름에서도 분위기가 느껴지는 ‘김장 전투’라고 부른답니다. 해마다 김장철이면 운송 기재는 물론이고 소달구지나 손수레에 이르기까지 총 동원해서 배추나 무를 나르고 밤을 새워가면서 배추를 다듬고 초절이를 하고 김장을 하는데 한 집에서 평균 500킬로 이상은 김장을 담그니까 전투라고 할 만도 한 겁니다. 저희도 어떤 해에는 800키로까지 김장을 담그기도 했는데요. 식구가 많거나 하면 한 톤 정도도 담습니다.
김인선: 남한에서는 10가정 중에 절반 정도, 평균 5가정에서만 김장 계획을 잡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것도 지난해 기준이에요. 김장을 하더라도 절여 놓은 배추를 사는 경우가 많은데요. 절임배추 한 상자에 20킬로 정도 되고 배추 6-7포기 정도 들어있다고 하거든요. 그 정도 양으로 김장을 하는 집들이 많더라고요.
마순희: 맞아요. 제가 한국에 와 살아보니 김장을 많이 하지 않더라고요. 처음엔 김장 양이 너무 적어서 이해가 안됐는데 1년 사계절 신선한 배추, 무가 없을 때가 없고 또 냉장고도 집집마다 다 있기에 김장을 딱히 김장철에만 하지 않더라고요. 아무 때나 시장에 나가면 김장 재료는 물론이고 갖가지 김치들도 늘 팔고 있으니 굳이 김장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김장 전투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우리 탈북민들도 남한에 와서 달라졌는데요. 행사로 축제 현장에서 김치도 같이 만들고 한 상자씩 나누어주면 그것으로 김장을 대신하는 분들도 많아요. 저도 해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지역의 경찰서들에서도 김치 나눔 행사에 참여해서 봉사도 하고 김치도 받고 뜻 깊은 하루를 보내기도 한답니다.
김장 때문에 또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주인공이 ‘김치’와 관련된 분이랍니다.대한민국에서 김치사업가로 창업을 시작한 북한 음식 전문가인 윤선희 씨인데요. 선희 씨는 몇 해 전 서울시에서 조직한 김치축제에서 북한 김치를 만들어서 선보였을 정도로 솜씨가 좋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윤선희 씨는 북한에서 한 국영 식당의 책임자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나라에서 공급되는 물량은 없고 식당은 운영해야 하니 불법적인 통로로 원자재를 구입하기도 해야 했는데요. 그러던 중에 2008년에 여권을 떼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접하고 한국 TV를 시청하면서 한국을 동경하게 됐다고 하는데요. 선희 씨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2008년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왔고 한국 정착 1년 정도 지났을 때 김치사업을 구상하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남한에 와서 1년밖에 안 됐으면 한참 정착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기라고 알고 있는데, 사업을 시작했다고요?
마순희: 네, 윤선희 씨는 시작부터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 정착교육을 받는 하나원이 있잖아요?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때부터 선희 씨는 뭐든지 빠르게 판단하고 습득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선희 씨도 처음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교육 중에 ‘알고 싶은 것이 많을 때 해답을 찾는 사람이 빨리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선희 씨의 머릿속에 콕 박힌 거죠.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던 선희 씨는 자신의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북한에서 국영 식당을 운영하였던 경험과 북한 전통음식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었던 선희 씨는 한국에 와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9년, 한국 정부에서 식이섬유만 있는 김치에 단백질을 보충하여 영양을 높이는 어딤채 김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 교육에 참석하면서 자신도 김치사업을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어딤채’가 생소한 이름이라 생각하는 청취자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요. 고기 ‘어’자에 김치의 순수한 우리말인 ‘딤채’를 합친 말입니다. 그래서 어딤채는 일반 김치에 전복이나 문어, 홍어, 낙지 같은 것이 10% 이상 들어간 수산물 김치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선희 씨도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가 북한에서 늘 담가 먹었던 가자미식해나 명태식해 등 발효음식과 김치가 결국은 어딤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김치는 북한에서도 늘 해먹던 거라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국영 식당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어서 참여하게 된 ‘어딤채’ 교육이 선희 씨에게는 안성맞춤이었던 겁니다.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자본주의를 경험하면서 어떻게 기업을 운영하는지도 보았고 거기에 남들보다 빨리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겸해서 한국 정착 1년 만에 선희 씨는 김치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남한에선 판매 상품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제품들은 이미 다 시장이 형성이 돼 있다고 과언이 아니거든요. 김치도 마찬가지인데요. 제조사별로 상품 김치를 생산하고 판매할 정도로 김치 판매 시장이 아주 큽니다. 대형 상점뿐 아니라 24시간 운영하는 상점인 편의점에서도 김치를 살 수 있고요. 동네 반찬가게에서도 김치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입맛에 맞는 반찬가게에서 김치를 사 먹기도 하니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한국에서는 집에서 김치를 담그기보다 대부분 사 먹더라고요. 김치 종류도 다양하고 또 판매하는 양도 다양해서 원하는 김치를 필요에 따라서 사먹는데 그 모습이 처음엔 그렇게 낯설고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양념 정도만 버무려서 금방 김치를 담글 수 있는데 그걸 안 하고 왜 사 먹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도 일상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편하게 사는 것이 습관이 되면서 지금은 굳이 힘들게 배추를 사서 다듬고 절이고 하면서 김치를 잘 담그게 되지 않더군요. 특히 선희 씨 같이 탈북민의 입맛을 사로잡는 김치를 만드는 사람이 생겼으니까요.
선희 씨는 뒤늦게 김치사업에 뛰어 들었지만 자신의 김치에 차별화를 두었습니다. 북한에서 하던 것처럼 김치에 명태나 가자미 등 어류를 손질해서 숙성하여 양념에 버무려서 만드는 어딤채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선희식품의 북한 김치는 인기가 많았는데요. 저도 선희식품을 찾아가서 사다 먹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김치에 명태를 넣으면 비린내가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명태의 살코기를 미리 숙성시켜 양념에 재웠다가 김치를 만들기에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는답니다.
김인선: 그러니까요. 진짜 맛있더라고요. 그런데 사업이라는 게, 규모에 따라 사업자금이 달라지긴 하지만 목돈이 필요하잖아요.
마순희: 대한민국에서는 창업을 시작하면 나라에서 대출을 해주는 제도가 있잖아요? 담보로 할 재산이 있다면 많은 돈을 대출받을 수 있었겠지만 선희 씨 같은 경우에는 담보로 할 재산도 없었기에 대출자금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선희 씨의 북한 김치는 한 번 맛본 사람들은 단골이 되어 재구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점차 수익도 늘어나고 사업이 더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선희 씨에게는 든든한 사업 동반자이자 조력자가 있었는데요. 바로 선희 씨 남편입니다. 남편은 항상 선희 씨의 옆에서 부족한 자금도, 남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사업 경험 부족 등 그 빈자리를 묵묵히 메꾸어 나가고 있는데요. 남남북녀 커플이 만들어 나가는 선희식품은 그래서 더 인기 있고 나날이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인선: 선희 씨의 가족이야기도 궁금했는데, 남편 이야기가 등장했네요. 한국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이 사업 동반자로 함께 하니 든든하겠습니다. 가족의 지원으로 선희식품이 날로 더 번창했다고 하는데요. 어느 정도 성장했을까 궁금해지네요. 선희 씨의 못다한 이야기,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