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사랑에 있다, 황선희 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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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액세서리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황선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선희 씨는 29살이었던 2004년에 한국 땅을 밟았는데요. 식당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만 살아왔던 선희 씨가 뒤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가족 하나 없이 남한에 정착하면서 외로움이 가장 힘들었다는 선희 씨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생겼습니다. 정착 초반에 운명처럼 만나게 된 지금의 남편은 선희 씨에게 안정된 생활과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줬는데요. 선희 씨는 시간이 갈수록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남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작은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남편에게 ‘나도 일을 하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까지 남편의 동의를 얻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남편이 늘 자신만 믿고,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 애들이나 잘 키우라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애쓰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항상 자신이 허송세월 하는 것 같고 떳떳치 못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더니 그제야 남편이 알겠다고 답을 하더랍니다. 선희 씨는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일을 시작했고 그 일이 바로 액세서리, 장신구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김인선: 집에 있던 엄마가 일을 시작하면 첫 번째 난관이 아이들 떼어놓는 거거든요. 선희 씨는 순조롭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다행히 선희 씨는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 합니다. 선희 씨가 일하는 액세서리 만드는 회사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몇 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고 해요. 그래서 애들을 학교나 유치원에 보내고도 출근시간을 맞출 수 있고요. 또 저녁까지 연장근무를 안 해도 되는 일당 형태의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규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월급은 많지 않지만 애들을 돌보면서도 일할 수 있는 지금의 회사가 선희 씨에게는 딱 적합한 곳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큰 기술이 필요 없고 힘든 일도 아니라고 해요. 다만 손톱보다도 작은 부품을 붙이거나 연결하는 일이라 섬세하고 눈썰미가 있어야 하기에 여성들에게 꼭 어울리는 일이라고 하는데요. 선희 씨는 여러모로 안정적인 지금의 회사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신에게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남편에게도, 자신을 받아 준 회사 사장님에게도 늘 고마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김인선: 또 남편 얘기가 나오네요. 선희 씨의 대답에서 남편 얘기가 빠지지 않는데요. 사실 오랜 기간 동안 연애를 하고 신뢰가 생긴 후에 결혼을 해도 다툼이 있고 권태기가 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선희 씨 부부는 여전히 금슬이 좋은 것 같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면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부부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군요. 선희 씨 부부 역시 그런 모습이었는데요. 선희 씨는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 모든 공로는 오직 첫째도, 둘째도 남편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하면서 그런 남편을 만난 것이 자신의 일생에서 일확천금에 당첨된 것 같은, 한마디로 로또 맞은 거라는 농담까지 하더라고요.

김인선: 선희 씨처럼 남편을 잘 만난 분을 보고 ‘남편복’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 복은 얼굴에도 묻어난다고 해요. 갑자기 선희 씨의 얼굴이 궁금해지네요.

마순희: 황선희 씨는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편하게 해주는 얼굴이에요. 개인적으로 저와는 한 고향이라 오랜만에 만난 조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요. 지금 얼굴을 보면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 것만 같지만 선희 씨에게도 여느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1999년, 고난의 행군으로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겨우겨우 버텨 나가던 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셨거든요. 당시 23살이었던 선희 씨는 언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한 동네에 살던 언니의 소개로 중국에 가게 된 것인데 실상은 팔려간 것이었습니다. 강을 건너자마자 두 자매는 각각 다른 곳으로 헤어지게 됐고 그 때 헤어진 언니는 지금도 생사를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선희 씨는 지금도 가끔 그 일로 잠자리에서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서 깰 때가 있다고 합니다.

김인선: 마음 고생, 몸 고생 많으셨지만.. 한국에 와서 남편복이 생겼다고 했잖아요. 앞으로 웃을 일이 훨씬 많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남편 덕분에 좋은 일이 생겼다면서요?

마순희: 네, 선희 씨의 아픈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남편은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북한에 있는 선희 씨의 가족을 데려오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선희 씨는 친정어머니와 사랑하는 여동생 가족까지 모두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가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두 집 식구들이 함께 놀러가기도 하는데요, 선희 씨는 지금 그런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편안한 보금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잘 살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대한민국에 제대로 정착한 거 아니겠는가고 하면서 처음 혼자 한국에 나왔을 때를 생각하면 오늘의 행복이 꿈만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든 행복이나 성공의 중심은 남편임에 틀림없어 보였는데요. 때론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신은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한 얘기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무슨 말인지 가늠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뭐가 선희 씨를 힘들게 했을까요?

마순희: 평소 생활을 하면서 선희 씨를 아끼고 존중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선희 씨가 아프기라도 하면 직접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정성을 다 한다고 하는데요. 선희 씨는 요리솜씨가 없어서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못 해줬고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어려운 살림에 힘들게 살다 보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지도 못했고 요리를 배우거나 만들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기에 선희 씨를 도와줬다고 합니다. 남한의 음식문화나 요리를 같이 만들었고 때로는 맛집을 찾아가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은 선희 씨 혼자서도 웬만한 정도의 음식은 크게 걱정을 하지 않은 정도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가끔은 남편에게서 전업주부 못지않은 솜씨라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고 합니다.

김인선: 신혼도 한참 지났는데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분들이 현실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돈데요. 결국 남편의 한결같은 사랑이 선희 씨 마음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 아닌가 싶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워낙 크다 보니 선희 씨는 때때로 꿈같은 이 행복이 하루아침에 달아날 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는데요. 선희 씨는 그래서인지 큰 욕심보다 온 가족이 건강하고 그냥 이대로만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합니다. 북한을 떠나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혼자 정착하면서 외로움을 이겨내고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하루하루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황선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면서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맞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져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더 높이,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부리기 마련인데 선희 씨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저도 왠지 부끄러워지네요. 우리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잘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