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무역전문가 정동훈 씨에 대한 이야기 나눠볼게요. 동훈 씨는 북한의 러시아 무역대표부에서 근무하던 분으로 좋은 성분을 타고난 엘리트 출신, 쉽게 말해 간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사업차 절차 문제로 어느 날 갑자기 송환 명령을 받게 됐다고 했죠?
마순희: 맞습니다. 러시아에서 일하면서 중국에 가서 계약을 해야 하는데 대사관에 신고하고 외교부와 중앙당을 거쳐 승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려면 한 달이 더 걸려야 했기에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 사업을 선행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꽤 많은 이익을 냈고 자신의 판단과 상황설명을 상부에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선 성과보다 상부의 지시가 더 중요하기에 큰 죄가 되거든요. 처벌대상자로 송환되면 어떻게 될 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동훈 씨는 고민 끝에 망명을 결심했고 추적을 따돌리며 어렵게 한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올해로 한국에 온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요. 충청남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지금도 신변노출을 자제하고 조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민이 북한을 떠나 한국에 오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을 거친다고 하는데요. 정동훈 씨 역시 힘들게 한국 땅을 밟으셨어요. 그동안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드셨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정착 초반, 한국생활에 대한 어려움은 물론이고 신변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적인 고통까지 심하게 겪었다고 합니다. 외로움과 극심한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서 술을 가까이 했고 자주 많이 마시다 보니 건강이 악화됐습니다. 알코올중독으로 간경화까지 이르게 됐는데요. 통증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3일 만에 깨어나기도 했습니다. 담당의사는 정동훈 씨의 치료를 거의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동훈 씨의 담당형사님과 지금도 친구처럼, 형님처럼 지내신다는 한 사장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치료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동훈 씨는 3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고 이후 서울의 한 병원에서 장기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정동훈 씨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던 겁니다.
김인선: 두 분 모두 생명의 은인이신데요. 그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정동훈 씨가 빨리 건강회복을 하셨으면 좋겠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동훈 씨를 위해 여러 사람들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까요. 그분들을 더 이상 실망시킬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맘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동훈 씨의 건강이 악화되어 노동능력 상실로 판정을 받게 되었거든요. 동훈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북한에서부터 무역을 했던 경험을 살려 자그마한 무역사업을 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충청도에서도 비교적 땅값이 싼 시내 변두리에 있는 임시 가건물에서 첫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부터 해 오던 전문분야이고 또 큰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작한 첫 사업이었기에 동훈 씨는 말 그대로 열과 성을 다 해서 사업을 해 나갔고 가게는 날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동훈 씨는 지금도 그분들의 진심어린 도움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성공적인 정착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김인선: 살다가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일도 많지만 결국은 또 사람 때문에 위로를 받게 되잖아요. 동훈 씨에게 살고 싶다는 희망,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준 것 역시 사람이네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이 한 사람을 살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초기 정착 탈북민에게는 주변 사람의 응원과 격려, 위로가 큰 힘이 됩니다. 지금은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면 정착도우미들도 있고 거주지역 정착생활을 도와주는 하나센터나 전문상담사들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지만 정동훈 씨가 초기정착을 하던 2004년경에는 그런 제도들이 없었을 때였습니다. 다만 신변보호 담당관인 담당 형사님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요. 3일간이나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입원해 있던 정동훈 씨를 제일 먼저 찾아온 분도 바로 담당 형사님이었습니다.
담당 형사를 통해서 동훈 씨의 사연을 듣게 된 대한적십자사의 지역 회장님들과 사장님들이 발 벗고 나섰고 그분들 중에 친형님처럼 동훈 씨를 챙기고 도움을 주는 한 사장님이 계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어려움에 처한 동훈 씨에게 고마운 분들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아무리 땅값이 싼 시내 변두리에 있는 임시건물이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동훈 씨에겐 그림의 떡이었을 겁니다. 막막했던 그때 어떤 분은 무역회사를 만들 수 있는 건물을 임대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고, 또 어떤 분은 사업을 해 나갈 수 있도록 거래처들을 소개해줬다고 합니다. 정동훈 씨는 지금도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처럼 잘 정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인선: 목숨만 살려준 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일감까지 이렇게 챙겨주시고 정말 동훈 씨 인생의 은인들이시네요. 이분들 때문이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겠어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그런데 동훈 씨에게 손을 내밀어 준 또 다른 한 사람이 더 생겼기에 힘이 더 났을 것 같습니다.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동훈 씨에게 지인들은 지금의 부인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돈 벌러 왔다는 부인 역시 사랑하는 자식들을 두고 혼자 한국에 왔기에 동훈 씨의 마음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그냥 간병인으로, 함께 사업하는 회사의 한 직원으로 생각하라고 하면서 아낌없는 정성을 쏟아 부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부인의 노력 덕분인지 지금은 동훈 씨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것 같습니다. 올해 동훈 씨의 나이가 60대 초반이지만 구릿빛 얼굴과 단단한 체구의 그의 모습을 보고는, 누구도 사경을 헤맬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인데요. 결국 그를 살린 것은 바로 사람, 사랑의 힘이었고 사람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인선: 나이를 먹을수록 각자의 인생철학이 생기는 것 같아요. 동훈 씨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 주변 사람들이 많아서 자신만의 인생철학이 확고해졌다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정동훈 씨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이죠. 한국에서 살면서 다시금 깨달은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동훈 씨는 지금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업장은 시내 변두리의 임시건물에서 시작했지만 8년 전부터 시내 한복판으로 자리를 옮겼고 고정 거래처들을 확보하고 있는 안정적인 사업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루하루를 편히 살 수 있고 아침에 일어나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는 평범한 삶이 곧 행복이고 정착이라고 동훈 씨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정착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고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할 줄 모르고 사업을 하면서도 돈보다도 사람을, 이득보다는 신용을 더 중시하는 정동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왔었는지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세상살이는 행복해진다고 하죠. 동훈 씨의 말처럼 상대방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할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