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억척 아줌마, 편의점 사장 장은진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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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에선 최근 코로나비루스 확진자가 하루 500~600명대로 급증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있는데요. 남한 정부에선 외부활동 자제를 권고하면서 50명 이상의 모임이나 행사는 금지했고 주요 다중이용시설은 오후 9시 이후엔 문을 닫도록 했습니다. 또 서울시는 매년 12월 31일 밤부터 이듬해 1월 1일 새벽까지 진행해 온 '제야의 종' 타종 행사를 올해는 열지 않기로 했더라고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최대한 막는 거죠.

마순희: 네. 그래서 기업 연말풍경도 바뀐다고 하더라고요. 며칠 전 ‘일부 직장인들은 재택근무하면서 온라인 종무식을 접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라는 기사를 봤거든요. 우리 탈북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2월이면 각 기관별로 다양한 연말모임이 있었는데 코로나비루스 때문에 줄줄이 다 취소됐어요. 특히 해마다 이맘때면 김장행사를 대대적으로 했었잖아요?

김인선: 맞아요. 회사별로 지역별로, 또 소모임 별로 크고 작은 단체마다 11월부터 12월 사이에 김장행사를 하는데요. 올해는 코로나비루스 여파로 많이 축소됐죠.

마순희: 네. 이맘때면 우리 탈북민들도 경찰서나 복지관, 그리고 민간단체들에서 김치행사를 하면 다 같이 모여 봉사도 하고 봉사가 끝난 후엔 김치 한 상자 씩 받아올 수도 있었는데요. 올해는 소규모로 진행해서 도움이 필요한 각 가정에 직접 가져다 주는 형태로 됐더라고요. 아쉽기도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꼭 필요한 곳에는 전달됐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몸의 거리는 많이 멀어졌지만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진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더라고요. 요즘 다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김인선: 맞아요. 다들 애써주는 만큼 조만간 거리두기효과가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최근 집 가까이에 적어도 한, 두 개씩 있는 편의점에서 거리두기효과를 본다고 하는데요. 이전보다 매출이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대형 상점이나 식당 등 대부분의 장소가 9시면 문을 닫지만 편의점은 24시간 운영되는 상점이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아요. 탈북민 중에도 편의점을 운영하는 분들이 좀 있죠?

마순희: 네. 제 주변에도 아는 분들이 편의점을 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요. 탈북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에서 편의점 창업지원을 통한 탈북민 자립자활 지원사업을 하고 있거든요. 아마 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북하나재단에서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편의점 창업 희망자를 모집하고 지원하거든요. 대상자로 선정되면 가맹점 계약 시 상품보증금 50%를 지원해 주고 또 창업기본교육과 직무교육, 점포 운영 체험도 지원한다는 내용들을 보고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오늘 소개해드리려는 주인공도 충청남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랍니다. 편의점 1개가 아니라 3개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당찬 사장님! 장은진 씨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김인선: 편의점이 먹을거리부터 급하게 필요한 일상용품들이 다 있다 보니 점포가 작은 편이 아니잖아요. 그런 가게를 세 개나 운영하시다니 일단은 크게 성공하신 것 같은데요? 이게 다 앞서 말씀하신 창업지원정책으로 가능했던 건가요?

마순희: 그렇지는 않습니다. 은진 씨가 편의점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그런 지원사업들이 없었을 때였거든요. 탈북민 초기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하고 거주지역인 충청도에 처음 정착을 시작할 때가 2010년이었는데요. 당시 은진 씨의 나이는 40대 후반이었습니다. 편의점을 운영한 건 50대가 지나서였는데요. 우선 한국에 오기 이전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드릴게요.

장은진 씨는 2008년 중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바라고 도강을 하다가 잡혀 온성군 교화소에서 8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병보석으로 나오자 그래도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아들과 딸에게 ‘엄마가 먼저 중국에 가서 자리 잡고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탈북했습니다. 그렇게 은진 씨는 2009년 4월에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에서 8개월 정도 있다가 한국교회를 알게 되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은진 씨는 북한에 두고 온 두 자녀를 하루 빨리 데려오기 위해서 정착을 시작한 첫 날부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자리를 찾았다는데요.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자격 요건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는 음식점에서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하루 만에 그만뒀습니다. 당시 8월이었는데 손님이 물수건을 따뜻하게 해 달라며 던져주는데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손님과 다투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물수건을 던진 건 무례하지만 손님의 입장에서 물수건을 따뜻하게 데워 달라고 요청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낯선 땅에서 마주한 현실이 은진 씨에겐 어려웠을 것 같긴 해요.

마순희: 네. 한국생활을 하면서 고객응대, 서비스, 고객만족 이런 것에 대한 것을 알게 됐지만 정착 초반인 탈북민에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장은진 씨의 경우 북한에서 전기관련 일을 했던 사람으로 서비스업과 거리가 멀었고 한국 와서도 초기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이 다였기에 더 어려웠을 겁니다. 은진 씨는 손님과 다투고 그날로 일을 그만두고 이 일, 저 일, 일용직 형태로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하는 짬짬이 요양보호사자격증도 따고 어렵다는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답니다. 그러나 일로 연결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도 일해 보고 또 다른 식당에 취직해 음식을 나르며 손님의 시중을 드는 서빙일을 했지만 은진 씨는 튀는 말투와 눈에 거슬리는 일을 보면 참지 못 하는 성격인 탓에 오래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기까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시더라고요. 궂은일도 많았겠지만 편의점도 많은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라 그런 시행착오가 도움이 되었겠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은진 씨가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번 돈은 고스란히 북한으로 다 보냈습니다. 하지만 탈북민이 북으로 보낸 돈은 브로커 비용을 떼고 나면 자녀 앞으로는 얼마 가지도 못 하는 게 현실입니다. 힘들게 돈을 보내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북한의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인 거죠. 은진 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은진 씨는 하루 빨리 돈을 벌어서 두 자녀를 데려오는 것만이 방법이라는 생각에 아글타글 돈을 모았습니다.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중 탈북민단체에서 일하는 한 지인의 소개로 24시간 운영하는 상점인 편의점 부업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은진 씨는 편의점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면서 찾아갔었는데 직접 일해 보니 의외로 적성에 잘 맞더라는 것입니다. 북한에 있을 때 생계를 위해 장사를 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되었던 거죠.

김인선: 편의점이 장사가 잘 되는 게 동네마다 잘 갖춰져 있어서 거의 집 앞에, 그것도 웬만하면 24시간 언제든 갈 수 있다는 편리함 때문인데요. 반대로 편의점에서 일하기에는 만만치 않다고 해요. 밤새 안 자고 일을 해야 할 땐 더 그렇겠죠. 그럼에도 부업으로 시작했다는 은진 씨가 세 개까지 점포를 늘릴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