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진행을 맡은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권효진 씨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게요. 이름이 예뻐서 여자분 같지만 효진 씨는 남자분이셨는데요. 여느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한 후에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았다고 했죠?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2009년 한국에 정착한 권효진 씨는 일한 만큼 돈을 받는 일용직으로 한국 사회를 먼저 알아갔고 일자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북한 관련 소식을 전하는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이 됐고 동시에 북한 사회의 실상을 알리는 안보강사 활동과 탈북민 인권단체의 실장으로도 추천 받아 몇 년간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울 만큼 경제적인 보상이 따르지 않았기에 효진 씨는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5살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지방에 내려가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목공예 일이었는데 손재주가 좋았던 효진 씨는 판매에 기여를 했을 만큼 제품을 잘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 기여도를 회사에서는 인정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효진 씨는 제 일처럼 일을 잘 해서 회사에 큰 이득을 주면 보상이 따를 줄 알았기에 실망감이 더 컸습니다.
김인선: 그래서 효진 씨는 이직을 하게 되는데, 직업 선택에 있어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했던 것 같아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효진 씨가 그동안 한국에서 살아 보니 한국 사람들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 속에 머무는 캠핑을 즐기는 사람도 많았고 수요가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캠핑카에 관심을 갖고 캠핑카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경력이 없었기에 최저 시급으로 취직했지만 남다른 기술력과 성실성을 오래지 않아 인정받았고, 회사에서는 그에 따라 월급도 올려 주었습니다. 효진 씨는 이 회사에서 기술도 익히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오래 일하고 싶었는데, 1년 정도 지났을 때 회사가 멀리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면서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효진 씨는 이미 캠핑카 제조 분야에서 기술자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다른 캠핑카 회사로 이직이 가능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는데요. 이제는 제작부장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손재주라는 것이 타고난 경우도 있지만 효진 씨의 경우에는 한국에 와서 열심히 배우고 노력한 것과 함께 북한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이력 덕분이었습니다.
6군단 사건과 패싸움으로 바뀐 인생
김인선: 북한에서도 경험이 다양했다는 말은 신변의 변화가 여러 번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되는데요. 제 해석이 맞나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효진 씨는 고급 군관이었던 아버지와 전쟁 참가자 출신이었던 어머니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효진 씨가 8살이 되던 해 처음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유명한 6군단 사건(쿠데타 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출당, 강직되면서 청진제강소에서 회전로공으로 근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년 후 두 번째 변화가 찾아 오는데요. 효진 씨의 아버지가 다시 복당하고 자재공급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다시 생활이 나아진 효진 씨는 어려움 없이 지내게 되고 청진시에서 고등중학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청진시는 패싸움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습니다. 효진 씨도 거기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진시에서 패싸움으로 인명 사고까지 나자 나라에서는 엄중처벌을 내세웠습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안전부에 잡혀가거나 산골로 추방됐는데요. 효진 씨는 아버지가 시멘트 두 차량 분을 뇌물로 바치면서 겨우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로 사회에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처벌 받을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군사동원부와 사업해서 효진 씨를 조기에 군에 입대하도록 했습니다. 효진 씨는 이른 나이에 군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전차병으로 7년을 근무했고 나머지 3년은 사단의 사진사로 근무한 후 대학 추천을 받고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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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군 복무 기간에도 변화가 많았네요.
마순희: 네. 효진 씨는 전차병으로 7년을 보냈는데요. 1년간은 장탄수로, 2년간을 조준수로 복무한 뒤 4년차부터 전차장으로 근무했습니다. 마지막 근무 3년은 여단의 사진사로 일했는데, 효진 씨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 보니 전차장 시절 대대의 벽보와 선전화를 도맡아 그리는 직관원도 겸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여단 지휘부에 알려지면서 보직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이 남달랐던 효진 씨는 제대하면 꼭 평양미술대학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그에게 차례진 대학은 화학단과 대학이었습니다. 효진 씨는 그 대학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김인선: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웠던 게 아니라 타고난 거였군요. 그런데, 입학 거부가 가능한 일인가요?
마순희: 직장 배치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대학에 안 간다고 하는 거라서 그나마 용납이 되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효진 씨는 1년만 근무하면 평양미술대학에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김책제철소 직관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1년 후에도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경성도자기대학에서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졸업한다고 해도 자신의 직업이나 경제활동에 큰 도움이 안 될 것을 알게 되면서 효진 씨는 졸업을 1년 앞두고 다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그때부터 효진 씨는 이곳, 저곳에서 일을 했는데요. 선전부 지도원 겸 신문 주필도 했고 도 예술단 미술가로도 일했습니다. 그림을 마음껏 그리게 되고 전국 인민미술축전 심사위원으로도 발탁이 되면서 앞길이 슬슬 풀리는가 싶기도 했는데, 직장을 이동하면서 당적 이동이 문제가 되어 출당을 당하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효진 씨는 돈이라도 벌겠다는 생각으로 중국 조선족 상인들과 교류하며 잣과 해산물 등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수만 달러 벌다 국군 포로 찾아줘 15년형
수만 달러의 돈을 벌었을 정도로 잘 됐는데, 거래하는 한 상인에게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들어주면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효진 씨가 찾아준 사람이 국군포로였다는 겁니다. 그 일로 효진 씨는 보위부에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전거리 교화소에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가족 전부가 매달려 뇌물과 인맥을 동원한 결과 여러 차례의 대사령과 감형 등을 받아 7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더 이상은 그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에 효진 씨는 오랜 준비를 거쳐 탈북했고, 3개월 만에 한국에 입국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효진 씨는 부업으로 시작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그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며 최선을 다해 매진하는 것으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정착 후 2년 만에 북한에 있던 아들을 데려 왔고 마음에 맞는 탈북 여성을 만나 부부의 인연도 맺었습니다.
김인선: 안식처가 생긴 거네요.
마순희: 네. 효진 씨는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이 자유롭고 행복한 자신의 안식처를 찾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재능껏 능력을 펼치고 있는데요. 두 차례의 미술전시회를 열 정도로 미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미술가가 되었고, 자신의 본신 업무인 캠핑카 제작과 함께 글쓰기와 그림 등으로 자신의 활동을 넓히고 있습니다. 한국 서예를 배우면서 북한 서예를 접목시켜 통일 서체를 만들고 싶다는 꿈도 생겼고, 틈틈이 글도 쓰고 있습니다. 탈북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지내다 보니 작년 10월부터 국제펜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의 이사장으로 추대 받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캠핑카를 몰고 북한으로 가고 싶다는 꿈도 있다는데요. 통일 캠핑카를 타고 북한에 가고 싶다는 권효진 씨의 당찬 포부가 반드시 실현되기를 바라며 그 꿈을 함께 응원합니다.
김인선: 인생이라는 화폭에 자신만의 삶을 그려나가는 권효진 씨처럼 청취자 여러분들도 원하는 삶을 찾아 이루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효진 씨가 만들게 될 통일 캠핑카를 기대하면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마순희의 성공시대. 지금까지 진행에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