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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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진행을 맡은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김남일 씨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게요. 남일 씨는 중국에서 10년을 살다가 오신 분이셨죠?

마순희: 네. 김남일 씨는 어머니와 함께 2010년, 22살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중국에서 10년을 살다가 갑작스럽게 한국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남일 씨 어머니가 남일 씨와 누나들을 데리고 2000년에 탈북을 했는데요. 당시 남일 씨는 12살이었습니다. 남일 씨의 어머니는 막내아들만큼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염원이 컸다고 하는데요. 중국에 친척들이 많았기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중국행을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일 씨의 어머니는 중국에서 살다가 청소년기에 북한에 나갔던 분이셨는데요. 어머니의 옛날 호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덕분에 친척들이 돈을 모으고 노력해서 호적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일 씨는 중국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초, 중, 고등학교까지 진학이 가능했습니다.

김인선: 공부도 굉장히 잘했다고 했잖아요?

마순희: 네. 김남일 씨는 흑룡강성과 하얼빈에서 제일 가는 고등학교인 하얼빈 1고등학교에 진학이 가능했는데요. 수재들만 모이는 학교였습니다. 남일 씨는 그곳에서도 매번 1등이었고, 학교의 교사들도 북경대나 청화대 대상이라고 자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일 씨는 원치 않게 어느 날 갑자기 학업을 중단해야 했는데요.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탈북민 신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누나들은 북한에 잡혀갔고 남일 씨는 어머니와 함께 한국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 한국에 입국한 남일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경제활동을 시작했는데요. 건설현장에서 하루 일한만큼 로임을 받는 일용직이었습니다.

김인선: 중국에서 공부만 하다가 갑작스럽게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기까지 했는데, 한국에 와선 돈부터 벌게 된 남일 씨, 운명이 너무나 급격하게 바뀌는 것 같아 안타까운데요. 공부를 포기한 건 아니겠죠?

마순희: 네. 물론입니다. 남일 씨는 우선 돈부터 벌어 브로커 비용도 갚고 북송된 누나들을 다시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사명감이 컸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김남일 씨가 잠시 공부를 미루게 된 이유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왔을 때 중국에서의 학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남일 씨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다니던지 아니면 검정고시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검정고시는 정규 학교를 졸업한 것과 동일한 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으로,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거나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경우 응시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탈북민들에게는 검정고시를 통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통해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고 대학에 가는 탈북 청년들도 많은데요. 몇 년 간의 공부를 몇 개월 간에 습득하는 일이다 보니 쉽지는 않습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공부를 잘 하기로 소문이 났던 남일 씨에게는 공부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는데요. 검정고시라는 것이 1년에 두 번, 4월초와 8월초에 있는 만큼 공부를 잘 한다고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남일 씨가 하나원을 나왔을 때에는 입주한 날부터 브로커 비용을 갚으라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기에 우선 돈을 버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2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김남일 씨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브로커 비용을 다 갚았고 짬짬이 검정고시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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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씨와 아들 /김남일씨 어머님 제공

김인선: 탈북민 특별전형도 있고, 탈북민 지원제도도 있는 만큼 이제는 남일 씨가 마음 놓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김남일 씨도 마음 놓고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요. 탈북민 특별전형으로 대학입학이 가능했지만 검정고시로 대학입시 시험이 가능한 자격 요건만 갖추고 정시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한국학생들과 당당히 겨루어도 뒤지지 않는 성적으로 대입시험을 통해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입학한 것입니다. 미래의 기계공학도가 되려는 포부를 안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던 남일 씨는 방학 기간에도 학교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교수연구실에서 보조를 하는 부업을 하며 돈을 벌었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남일 씨는 하고 싶었던 공부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는데요. 어머니는 그동안 아들이 대학 공부를 미루고 일용직으로 힘든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늘 마음이 아프고 안쓰러웠다고 합니다. 남일 씨는 그동안 사랑하는 누나들과 조카들까지도 모두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 노력은 그 무엇으로 칭송해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일 씨는 대학 생활, 학부과정 4년을 마친 후 석사과정인 대학원에 바로 진학했습니다.

김인선: 머리도 비상하고 인성까지 갖춘 남일 씨네요. 세대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학업에 매진하기 시작한 만큼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탈북민 장학금 지원제도도 학부 과정에만 적용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현실적으로 대학원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마련해야 하는데 남일 씨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마순희: 네. 남일 씨는 경제적인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요.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도 컸고, 남일 씨도 방학 때마다 교수님들의 연구소에서 부업을 하면서 돈도 벌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한 편으로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 걱정은 하나도 하지 말고 공부에만 열중하라며 연로하신 어머니의 응원이 있었습니다. 남일 씨의 어머니는 북한에서 교사 출신이었던 지라 교육열이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남일 씨를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돈을 벌었는데요.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남일 씨는 늘 걱정이 된다고 합니다. 남일 씨의 주선으로 무사히 한국에 입국한 누나들도 모두 남일 씨의 학업에 전적인 지지와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인선: 그럼 이제는 대학원 졸업도 했겠는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남일 씨는 대학원까지 다 졸업하고 지금은 굴지의 대기업에서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손꼽히는 전도유망한 연구원인데요. 그 사이 결혼도 했습니다. 교회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여자 친구와 몇 년을 교제하다가 결혼했는데요. 아들이 벌써 네 살이 됐습니다. 얼마 전에는 둘째 임신이라는 기쁜 소식도 전해져서 온 가족이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데요. 한국에 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원하는 분야에서 일을 하며 화목한 가정까지 일구어 낼 수 있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김남일 씨입니다. 공부와 관련해서 남일 씨는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인터뷰 할 때도 남일 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요. 대학 교육을 우습게 생각해서 학업을 게을리 하는 일부 탈북 친구들이 있다며 '대학은 배우고 싶은 사람이 가는 곳이다. 문이 열렸다고 공짜라고 아무나 들어와서 폼만 잡는 데가 아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에 입학했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노력해서 실력을 쌓고, 자격을 갖추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는데요. 남일 씨의 그 말을 지금의 20대 청년들이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대한민국 중공업의 믿음직한 역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김남일 씨입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당당히 이 땅에 자리 잡고 한 가정의 남편과 아빠로서, 그리고 오직 아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아들로서도 부족함 없는 자랑스러운 탈북 청년 김남일 씨를 소리 높이 자랑하고 싶습니다.

김인선: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김남일 씨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행복이라고 말해주네요. 그 행복! 청취자 여러분은 충분히 만끽하고 계신가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마순희의 성공시대. 지금까지 진행에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