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2023년 새해가 시작되고 처음 인사드려요. 올해는 검은 토끼의 해인 '계묘년'인데요. 예부터 검은 토끼는 만물의 번영과 성장을 상징하는 영물로 여겨져 왔잖아요. 영리하고 기민한 동물로 잘 알려진 토끼처럼 2023년은 지혜롭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순희: 네, 저도 한 마디 덧붙이자면 토끼띠 생은 착한 성품을 타고난다고 해요. 이상주의자라고도 하고요. 웃기는 재주도 풍부해서 예능 계통에 재능을 보인다고도 하더라고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 토끼띠 한 해 지혜롭고 영리하게 성장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23년 성공시대는 깡충깡충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토끼처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정수미 씨의 정착이야기로 시작할까 합니다.
김인선: 안 그래도 대부분의 탈북여성들이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토끼처럼 살아가는 분이라면 대체 얼마나 쉬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분일까요?
두만강에서 미끄럼틀을 타다가 탈북?
마순희: 네. 제가 보기에도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수미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한에서나 중국에서나 그리고 대한민국에 와서 정착하는 기간에도 그 누구의 조언이나 도움을 받으면서가 아닌, 본인 스스로의 능동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강한 의지와 결단력의 소유자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으로서, 부모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응당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정수미 씨는 1998년 12월 두만강에서 친구랑 함께 미끄럼을 타면서 즐기는 척 하다가 누구의 소개를 받지도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해요. 3년 후인 2002년에 대한민국에 입국했고 정착하면서 부모님과 어린 딸까지 다 데려 온, 쉽지 않은 사례의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인선: 2002년이면 집단 탈북으로 떠들썩했던 시기였어요. 최초의 대사관 탈북이 있었는데요. 3월 14일, 무려 25명의 탈북민이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돌진한 사건이었습니다. 탈북민들이 순식간에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영상이 외신을 통해 공개되며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거죠. 같은 해 8월 19일에는 북한주민 21명이 어선을 타고 북한을 집단 탈출해서 서해를 통해 귀순한 일도 있었어요. 인원 면에서 최대 규모의 집단 해상탈북으로 기록되고 있는데요. 혹시 정수미 씨도 그분들 중에 한 사람일까요?
마순희: 수미 씨가 북경 영사관을 통해서 한국으로 왔다고는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관광객으로 위장한 탈북민들이 영사관에 갔다고 했는데 수미 씨의 경우 두만강 유역의 한 국경도시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타고난 끼와 재능을 인정받아서 군 선전대에 들어갔고 가수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했습니다. 가정을 꾸린 뒤엔 아이를 낳아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것입니다. 남편 혼자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딸을 키우며 살아왔던 수미 씨 가정은 1998년 고난의 행군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 앞으로 나오던 배급도, 노임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수미 씨네 가정은 무엇이라도 해야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가정주부로 살아왔던 수미 씨가 할 수 있었던 일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탈북 후 중국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 수미 씨
마순희: 맞습니다. 장사수완도, 밑천도 없었습니다. 수미 씨는 자신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마침 중국에 자주 드나들던 친구가 중국에 들어가면 한 밑천 벌어 가지고 올 수 있다고 수미 씨를 유혹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점점 더 힘들어지는 가정형편을 그대로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수미 씨는 다섯 살 어린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돈을 벌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수미 씨와 친구는 서로 갈라지게 됐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수미 씨가 동행하던 브로커의 소개로 7살 어린애가 있는 집에 한국말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소개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인선: 험한 곳 가지 않고, 험한 사람 만나지 않은 건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인데요.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한국말을 가르칠 수 있을까 제가 다 걱정되네요.
마순희: 그렇죠. 환경도 풍습도 다른 곳에서 가정교사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수미 씨에게 중국말은 낯설고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말이 가정교사지 파출부와 다름없이 지내게 됐고 집안일은 모두 수미 씨 몫이었습니다. 힘들었지만 수미 씨는 매달 받는 급여를 꼬박꼬박 북한으로 보내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날만 고대하면서 참고 이겨 나갔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벌 수 없는 돈이었기에 조금만, 조금만 더 벌어서 나가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견뎠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미 씨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벌어서 보낸 돈이면 북한에서는 한동안 그런대로 걱정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보낸 돈을 모으기는커녕 남편이 그 돈으로 다른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 후회되고,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괴로웠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습니다. 수미 씨는 브로커 비용을 마련해 한국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으로 보내던 월급을 몇 달 모았더니 충분했습니다. 마련한 비용으로 브로커를 통해 수미 씨는 2002년 북경영사관을 통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북한에 돈 보내던 수미 씨,
남편의 배신으로 한국행 선택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고생하고 도착한 한국에서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마음먹은 만큼 쉽지 않잖아요. 특히 남편의 배신으로 한국행을 선택한 수미 씨, 처음부터 잘 적응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수미 씨의 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직 가족을 다시 만날 생각으로 중국에서도 온갖 고생을 다 이겨내면서 지냈던 수미 씨였기에 한국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게 된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과 어린 딸까지 데려오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보니 힘든 줄 몰랐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부터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수미 씨는 자신의 거주지로 경상북도 포항을 선택했고 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부업을 하며 생활했습니다. 수미 씨는 시간제로 로임을 받는 일을 하면서 몸은 고달파도 희망이 있어 힘든 줄은 몰랐다는데요. 포항에서 정착하면서 수미 씨는 새로운 가정도 이루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같은 탈북민 남성이었고 둘 사이에 아들, 딸까지 낳아 키웠습니다.
김인선: 혼자였다면 낯선 한국에서 살아갈 길이 더 막막했을 텐데 수미 씨에게 가정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생겨서 심적으로 많이 안정됐겠어요.
마순희: 네, 수미 씨는 북한에 계시는 부모님도 모셔왔는데요. 다섯 살 때 북한에 두고 왔던 사랑하는 딸도 함께였습니다. 그동안 몰라보게 성장한 딸의 모습에 수미 씨는 잠시 내 딸이 맞나 싶었지만 딸아이가 한 눈에 엄마인 수미 씨를 알아 봐서 하염없이 눈물만 났습니다. 남편에게 의지한 채 안정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수미 씨는 한국에서 낳은 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주유소 시간제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큰 사건이 있다고 하는데요.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휘발유를 넣어야 할 차량에 경유를 넣는 사고를 저지른 것입니다.
김인선: 자동차마다 들어가는 기름 연료가 다 다르거든요. 가솔린차에 다른 기름을 넣으면 차에 손상이 가서 물어줘야 하는데 수미 씨 입장에서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수미 씨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