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정수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수미 씨는 군 선전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큰 변화를 겪었었죠?
마순희: 네. 수미 씨는 장사 수완도, 밑천도 없었기에 중국행을 선택했습니다. 다섯 살 어린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돈을 벌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집을 떠났습니다. 1998년 12월 두만강에서 친구랑 함께 미끄럼을 타면서 즐기는 척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지만 수미 씨는 친구와 서로 갈라지게 되는 불행을 겪었는데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여느 탈북 여성들처럼 인신매매를 당하는 아픔을 겪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미 씨는 브로커의 소개로 7살 어린애가 있는 집에 한국말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됐는데 말만 가정교사일뿐 파출부나 다름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매달 받는 급여를 보면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벌 수 없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미 씨는 번 돈을 꼬박꼬박 북한으로 보내며 조금만 더 벌어서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탈북 후 북한에 보내던 돈
한국 가는데 쓰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김인선: 수미 씨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번 돈이었는데, 북한에 보냈던 그 돈은 정말 어이없이 사용됐었잖아요?
마순희: 네. 수미 씨가 보냈던 돈이면 북한에서 생활을 하고 남는 돈을 모을 수도 있는 정도였는데 남편은 그 돈으로 다른 여성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수미 씨는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국행을 결심했고 북한에 돈을 보내는 대신 자신의 브로커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수미 씨는 북한을 떠난 후 3년 만인 2002년에 북경영사관을 통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경상북도 포항에서 정착을 시작했고 식당의 주방보조부터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부업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같은 탈북남성을 만나 새로운 가정도 꾸렸습니다.
중국에서부터 악착같이 돈을 벌어 모았던 수미 씨였잖아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틈나는 대로 부업을 하며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북한에 계시는 부모님과 다섯 살 때 헤어졌던 딸을 데려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부업을 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경험했다고 하는데요. 수미 씨가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휘발유를 넣어야 할 차량에 경유를 넣는 사고를 저지른 것입니다. 다른 연료를 주입한 후 차 시동을 걸면 자동차에 손상이 커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수미 씨의 실수로 연료 주입을 잘못해서 변상을 해야 했습니다. 마음 좋은 주유소 사장님이 함께 변상 처리를 해주었기에 수미 씨는 지금도 그 일을 잊지 못 하고 있더라고요.
김인선: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면 '과연 이 일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수미 씨는 어땠을까요?
탈북민들의 근본적인 고민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마순희: 수미 씨도 그 일이 변화의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돈 버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던 수미 씨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됐으니까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할 때 거주지가 정해지고 나면 지역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 지역별 하나센터의 지원을 받게 되는데요. 수미 씨도 포항에서 살아가면서 지역 하나센터 상담사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소개로 수미 씨는 통일안보교육 강사로 활동을 하게 됐고 파랑새중창단이라는 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수미 씨가 원래 선전대 가수 출신이었잖아요? 수미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창단의 대표로 활동하게 됐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수미 씨가 이렇게 대외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에서 데려 온 큰 딸 덕분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두 동생들을 돌보았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모든 생활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순탄치 않은 일들도 있었고 수미 씨는 남편과 이혼하게 됐습니다. 혼자서 세 아이들을 키워야 했기에 수미 씨는 안보강사로 활동하면서 식당과 주유소 등에서 시간제 부업을 다시 해야만 했습니다. 세 아이를 양육하면서 사는 삶이 힘들 법도 한데 수미 씨는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엄마라면 당연히 애들을 키워야 하고 가정을 유지하는 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물론 본인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지방자치단체의 도움도 상당히 크다고 했습니다.
김인선: 아이 셋을 키우려면 주변의 많은 도움이 절실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북한에서 데려온 첫째 아이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둘째, 셋째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건데요. 아이들끼리의 갈등은 없었던 거죠?
마순희: 탈북민 가정 내에서 한국에서 낳은 아이와 북한이나 중국에서 데려 온 아이 사이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 보니 수미 씨도 큰 딸을 데려오면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고 하는데요. 다행히도 동생들과 마찰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엄마보다 동생들을 너무 잘 돌보아서 애들이 일만 하느라 시간 없는 엄마보다 큰 딸을 더 따랐고 수미 씨는 집 걱정을 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사춘기를 맞는 큰 딸에게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수미 씨는 큰 딸이 더 신경 쓰이고 안쓰러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씩씩하게 잘 자라준 큰 딸에게 늘 감사한 마음뿐이고 큰 애를 믿고 따라준 작은 아이들에게도 고마운 마음뿐이라는 수미 씨입니다.
북한 선전대 실력으로
중창단 봉사활동과 가수협회 총무가 되다
수미 씨는 지금 가수협회의 지역 사무실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건강이 안 좋기에 부업하는 사람처럼 일하는 지금이 마음이 편하다고 하는데요. 한국 정착 초기에 다쳤던 무릎이 말썽이기 때문이랍니다. 당시 출퇴근길에 자전거를 이용했는데 어느 날 교통사고 났고 무릎을 다쳤습니다. 치료 받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말썽이어서 다리 수술을 두 번이나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수미 씨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 상황이 안 됐고 지금의 사무실 업무처럼 무리가 안 되는 일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역에서 지역축제가 있을 때마다 예술단 공연을 한다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김인선: 그런데 부모님 얘기가 아직 없어요. 북한에서 큰 딸을 데려올 때 부모님도 함께 모셔왔다고 했었잖아요?
마순희: 네. 부모님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이런 좋은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평생 그 땅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을 뻔 했는데 딸 덕에 호사를 한다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는데요. 두 분 모두 한국에서 잘 살고 계시다가 어머님이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아버님은 지금 80세로 수미 씨와 함께 살고 있고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큰 딸은 결혼해서 부산에서 지내는데 사위와 함께 둘이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들은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한국 최대 철강회사(포스코)에 입사했고 막내딸은 지난해 11월 대학입시 시험을 보고 이번에 경북대학교에 입학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혼자서 세 자녀 모두 대학교 공부를 시키고 훌륭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키워서 참 대단하다고 했더니 수미 씨는 제 힘만으로는 쉽지 않았다며 공을 다른 곳으로 돌리더라고요. 한 부모 가정이라고 나라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여러 가지 혜택들을 주었다는 수미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항상 긍정적인 사고로 감사함을 잊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정수미 씨의 정착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수미 씨도 2023년을 힘차게 시작했기를 바래봅니다.
김인선: 수미 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찾아낸 일이 결국 수미 씨가 좋아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수미 씨처럼 악착같이, 그리고 성실하게 살다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김인선, 에디터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