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북한에서는 양력설을 지내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는 음력설을 보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다가오는 22일이 음력설인데요. 한국에선 온 가족이 모이는 설 명절에 '금지어'로 여겨지는 말들이 있는데 혹시 아세요?
탈북민들의 명절 금지어?
마순희: 그렇더라고요. 젊은 애들에게 언제 결혼할 거냐, 대학은 붙었냐, 애는 언제 가질 거냐, 이런 말들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저도 들었어요. 하지만 명절의 특성상 평소 자주 만나지 못했던 가족과 친인척들까지 모이게 되는 만큼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30대 전후 사람에게는 결혼할 배우자를 만나는지를 묻고,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아이 얘기를 묻고, 이미 아이가 있으면 둘째와 셋째 계획을 묻고, 20대 전후 사람에게는 대학진학 문제랑 취업에 대한 얘기를 안 물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그것들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면 모르는데 기대에 못 미칠 때에는 시시콜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우리 탈북민들 사이에서는 명절에 북한에 있는 가족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지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가족이 있는 분들인 경우에는 함께 보내지만 혼자이신 분들은 명절을 그저 그렇게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가족 대신 환자를 보살피는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으로 일하는 분들은 명절이면 명절수당까지 일당을 높이 쳐 주니까 차라리 그냥 일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김인선: 한국 사람들 중에도 금기어 질문만 하는 어른들을 피해서 여행을 가거나 휴일 근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모아둔 돈이 있거나 할 일이 있는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거든요. 요즘 현실은 벌써 몇 년 째 코로나비루스 여파로 고용 시장이 얼어붙어서 젊은 사람들 뿐 아니라 한창 일할 4-50대도 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여성 실업 문제가 심각한데요. 지난해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 여성 실업자는 연평균 약 2.1% 증가한 반면에 남성 실업자는 연평균 약 0.6% 감소했더라고요. 코로나가 본격화된 2020년 기준 여성 실업자 수는 48만4000명으로 IMF 외환위기 당시(48만6000명)와 비슷한 수준이어서 놀랬습니다. 탈북여성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실업률 높아지는 불황 속 탈북민들의 취업은?
마순희: 코로나로 취업이 힘들다고 하는데요. 우리 탈북민들 경우에는 그 때문에 취업을 못 했다거나 일자리가 없다고 하는 경우는 드문 일입니다. 탈북여성들의 경우 사회복지 분야, 이를테면 요양기관이나 병원 같은 시설에서 근무하거나 건물이나 사무실 청소 같은 미화사업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코로나라고 해서 돌봄을 받을 대상이나 청소해야 하는 대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희들의 경우 일자리는 그전과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탈북민들 사이에서도 나이가 많아서 혹은 자격 요건이 적합하지 않아서 취업이 불가능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사실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그렇지, 일을 하자고 마음먹으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주인공은 2009년 12월, 48세에 한국에 입국했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친 뒤 3일 만에 바로 일을 시작한 이세영 씨입니다.
김인선: 한 분야의 전문기술이나 경력이 있는 경우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취업이 수월한데요. 한국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3일 만에 일자리를 찾은 세영 씨에게는 어떤 특별함이 있었을까요?
마순희: 사실 내세울 만한 특별함은 없었습니다. 굳이 꼽자면 일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라고 할까요. 탈북민들의 취업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세영 씨는 그런 혜택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취업지원제도를 통해 전문적인 직업훈련을 받고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처럼 40대 후반인 나이에는 어디든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면 된다는 것이 세영 씨의 생각이었습니다. 세영 씨는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돈 버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그렇게 직접 발품을 팔며 회사를 알아 나갔고 3일 만에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의류생산 업체였는데 단순 업무라 쉽게 취직이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는 6개월 이후에 부도가 났고 세영 씨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두 번째 일자리도 세영 씨는 어렵지 않게 찾았는데 공교롭게 이번에도 역시 근무한 지 1년 6개월 만에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세 번째 일자리는 탈북민들을 지원하는 하나센터 상담사의 추천으로 다니게 됐는데요. 처음엔 면접을 보러 갔을 때 45살까지만 직원을 뽑는다며 거절을 했다고 해요. 하지만 세영 씨는 면접관을 설득했고 최종적으로 세영 씨는 면접에 통과했습니다.
면접관 설득해 취업에 성공하다
김인선: 물론 취업을 도와주는 상담사의 역할도 크지만,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이거든요. 직원을 뽑는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열정이 느껴지는 사람이 회사에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을 할 테니까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면접관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걸 어려워해서 취업을 위해 면접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원에 다니기도 하는데요. 혹시 세영 씨도 그렇게 도움을 받고 면접 훈련을 했을까요?
마순희: 아니요. 최근에는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스피치 수업, 그러니까 말하기 수업이나 면접대비 강의가 있긴 하지만 이세영 씨가 입국했던 당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2010년 당시에는 먼저 한국에 정착한 탈북선배들의 정착이야기를 비롯해서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교육, 그리고 일자리 교육 등이 주를 이뤘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잊혀 지지 않는 이야기가, 탈북민들은 자격지심도 있고 자존심도 강해서 직장 생활을 오래 버티지 못 한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영 씨는 자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고 하는데요. 막상 사회에 나와 생활을 해보니 그 다짐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세영 씨가 취직한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세영 씨는 회사에 대한 파악도 없이 취업을 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려면 관련된 일을 하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영 씨는 탈북민들이 거주지역 내에서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하나센터를 찾았고, 취업지원을 돕는 상담사 선생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상담사 선생님의 소개로 의료기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면접을 보게 됐는데요. 45세 이하로 직원을 채용하는 회사라 당시 48세였던 세영 씨는 면접에서 탈락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세영 씨의 의지가 확고했기에 취업담당자는 망설였고 그 모습에 이세영 씨는 3개월 동안 수습기간을 두고 자신을 고용해 보고, 그래도 마음에 안 차면 내보내도 된다며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취업을 요청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세영 씨는 그 회사에 취직을 했고 3개월 수습기간을 거쳐 5년 넘게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세영 씨는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고용주의 입장에선 회사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부분에 대한 언급을 제대로 하셨으니까요. 문득 이세영 씨가 북한에서는 어떤 일을 했던 분일까 궁금해지는데요?
마순희: 북한에서부터 뭔가 특별한 일을 했을 것 같지만, 이세영 씨는 평범한 농장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국영담배농장에서 일했는데 아시는 것처럼 북한에서는 배급제잖아요? 그런데 1996년도 고난의 행군부터 배급을 안 주고 분배도 없었습니다. 세영 씨는 그 때부터 10년 동안 소토질(텃밭 가꾸기)을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김인선: 그동안 제가 만났던 탈북민들, 그리고 성공시대 주인공으로 소개됐던 분들 대부분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세영 씨는 힘겨운 고난의 행군 시절을 오래 버텼네요. 그랬던 세영 씨가 어떤 심경의 변화로 탈북을 하게 됐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