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면접관 설득해 합격한 그녀의 비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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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세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2009년 12월, 48세에 한국에 입국한 세영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뒤 2010년 3월 춘천에서 본격적인 한국생활을 시작한 뒤 3일 만에 일자리를 찾았잖아요?

마순희: 네. 이세영 씨는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자리를 찾았는데요. 직접 발품을 팔며 혼자 힘으로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6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 다시 찾은 일자리 역시 비슷한 상황으로 1년 6개월 만에 폐업을 했습니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세영 씨는 회사에 대한 파악도 없이 취업을 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했고 세 번째 일자리를 찾을 때는 탈북민들을 지원하는 하나센터 상담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상담사의 추천으로 세영 씨는 의료기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면접을 보게 됐는데, 면접관이 회사 측에서는 45세 이하의 직원을 채용한다는 조건이 있다며 채용을 망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영 씨는 3개월 동안 수습기간을 두고 자신을 고용해 보고 그래도 마음에 안 차면 내보내도 된다며 간절하게 취업 의사를 전했고 최종적으로 입사가 가능했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그래서 제가 세영 씨는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었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면접관이 채용을 망설일 때 탈락을 직감하고 포기하는데 세영 씨는 안 그랬으니까요. 제 생각에 이세영 씨는 일반적인 예측과 빗나가는 선택을 하는 분인 것 같더라고요.

아들 밥벌이 위해 떠난 중국

마순희: 그렇게 보여질 수도 있겠네요. 세영 씨에게 뭔가 비범함을 느끼신 것 같은데 사실 이세영 씨는 북한에서부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분입니다. 북한 함경북도의 한 시골 농장의 평범한 농장원이었고 또 아들을 둔 한 가정의 주부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소토지라고 부대기 농사를 지으면서 그럭저럭 굶지는 않을 정도로 살림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기에 세영 씨는 10년 동안 소토질로 생활을 이어갔지만 경제사정은 점점 안 좋아졌고 아들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공도 잘 차고 밝게 자라던 아들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에게 제대로 된 옷도, 학용품도 못 사주고 배부르게 먹이지도 못 하니 엄마가 이대로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세영 씨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두만강을 건넜고 그 길이 아들과 영영 이별하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했던 대로 되는 일이 없었고 인신매매로 베이징의 한 중국인 남성에게 팔려갔습니다. 그 중국인 남성과 동거하면서 동거인의 조카가 운영하는 시외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며 지냈고 식당에서 설거지 하면서 번 돈은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동거인의 조카가 주선해 주어서 4년 동안 북한으로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세영 씨가 로임을 제대로 받았다면 북한에 꽤 많은 돈을 보냈을 것 같은데요?

중국에서의 불안한 삶 때문에 선택한 한국행

마순희: 제대로 로임을 받았다면 많은 돈을 벌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북한으로 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 외에 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선 중국말을 모르기에 식당에서 일해도 설거지 밖엔 할 수가 없었고 그만큼 급여도 적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가끔씩 불법체류자들을 체포해 갔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었기에 매일매일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영 씨는 번 돈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했고 북한에 내보낼 때에도 수수료 명목으로 사례금도 주어야 했습니다. 북한으로 돈을 보낼 수 있었을 뿐, 큰돈을 보낼 수도, 모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북한에 있는 아들은 늘 엄마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아서 세영 씨는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공안의 단속이 점점 심해지면서 세영 씨는 살기 위해 한국행을 결심했는데 북한에 있는 아들과 영영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고민을 했고, 오랜 고민 끝에 세영 씨는 북한을 떠난 지 4년 만인 2009년 12월에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한국에 막 왔을 때 세영 씨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일을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처음 한국에 나왔을 때에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어서 일부터 찾았고 한 푼, 두 푼 모아서 브로커 비용을 장만한 뒤 아들을 데려오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아들은 혼자 있는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선뜻 한국행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세영 씨도 위험한 길에 굳이 아들을 나서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세영 씨는 지금까지 코로나로 연락이 안 되던 지난해를 제외하고는 북한으로 큰돈을 보내고 있습니다. 1년에 한국돈으로 400-500만원, 많게는 4천 달러 정도를 아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지만

훈훈하게 맞이한 그녀의 새해

김인선: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채로 돈만 보낸다는 게 마음이 굉장히 헛헛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이맘때 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올해 세영 씨는 따뜻한 새해를 맞이했을까요?

마순희: 네. 비록 아들과 새해를 함께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잖아요. 세영 씨는 하나센터의 상담사 선생님들과도 자주 만나면서 지역에 먼저 정착한 탈북민 선배들을 만나 함께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는데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같은 처지이기에 마음을 나누고 서로에게 힘을 주며 지내고 있습니다. 세영 씨는 그 모든 것들이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하는데요. 심적으로도 평온해지고 안정된 일자리까지 찾게 된 뒤에는 공부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습니다.

세영 씨가 취업에 성공한 세 번째 회사는 의료기기를 만드는 생산회사인데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3개월 수습기간을 거쳐 정식 직원이 됐고 일하면서도 인터넷을 이용해서 대학공부를 할 수 있는 사이버대학에 50세 나이에 입학했습니다. 세영 씨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일하는 짬짬이 정말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학위 인정을 받고 대학을 무사히 졸업한 뒤 세영 씨는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심리상담사, 요양보호사, 요리사 자격증 등 다양한 분야의 여러 자격증까지 취득했습니다.

김인선: 다행히 자신을 위한 삶을 잘 살고 계시네요. 바쁘고 힘들게 살고 계신 거 같은데, 주변에서는 세영 씨를 젊고 밝게 본다면서요?

빡빡한 삶 속에서도

그녀가 젊어 보이는 비결

마순희: 맞습니다. 세영 씨는 지금도 하나원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14년 전 그 때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합니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건강을 유지하면서 전문가로 일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스스로의 강점을 성실함이라고 말하는 세영 씨잖아요?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하면서 살다 보니 나이보다 젊게 사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또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이세영 씨는 지금 60살이 다 되어 오는 나이에도 노인사회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아들에게 본인이 일해서 번 돈을 보내는 것도 여전합니다. 북한의 아들이 장가를 가서 6세 손주가 있는데 언젠가 아들과 손주 앞에 서게 되는 날,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이고 싶기에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출근길을 이어간다는 이세영 씨입니다. 세영 씨의 앞날에 힘찬 응원을 보냅니다.

김인선: 아들 앞에서 또 손주 앞에서 자랑스럽게 서 있는 이세영 씨의 모습이 제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당당한 모습으로 북한의 자녀들을 만나고 싶다는 이 땅의 수많은 이세영 씨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