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남한에서도 통한 그녀의 장사 수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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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지난 한주, 역대급 한파로 남한에서는 여기저기 동파사고가 잇따랐습니다. 저희 친정집도 화장실 수도가 동파돼서 공사를 하게 됐는데 작업하시는 분이 요즘 누수 작업을 의뢰하는 분들이 정말 많다고 하더라고요.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집들이 이번 한파에 피해를 많이 봤다고 하는데요. 선생님 댁은 괜찮았어요?

마순희: 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는 동파사고 때문에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아요. 동파 예방차원에서 수도계량기에 담요 같은 것을 덮어두라고 아파트 관리실에서 계속 안내도 해준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단어이지만 북한에서는 알지 못했던 수도계량기였는데, 한국에서 살면서 새롭게 접하는 게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집집마다 자신이 소비한 전기와 가스, 수도 등에 계량기가 달려있고 계량기에 기록된 숫자만큼 그러니까 자신이 쓴 양 만큼 사용료를 내는 것도 신기했고 쓰레기 처리하는 것도 생소했습니다. 재활용 할 수 있는 생활쓰레기는 분리해서 배출하고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쓰레기대로, 준비된 곳에 버리는 것 등이 처음엔 그렇게 낯설고 서툴렀는데 지금은 그런 문화 없이 어떻게 살았었나 싶습니다.

음식문화 특히 커피와 차 문화도 마찬가집니다. 북한에서는 소설 속에서나 들어 왔던 커피나 차를 마시는 문화였는데, 한국에 와서는 습관처럼 되어버렸어요. 처음엔 저 쓴 커피를 무슨 맛에 마시나 싶었는데 지금은 커피향만 맡아도 좋고 밥 먹은 후 커피 한 잔 마시지 않으면 무언가를 빼먹은 듯 허전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도 커피와 연관이 깊은 분인데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접했던 커피문화에 매력을 느껴 자신이 직접 커피를 파는 카페를 창업까지 한 이미진 씨입니다.

김인선: 다양한 종류의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 창업을 한 분들을 보면 감각이 있고 장사수완까지 겸비했다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미진 씨도 마찬가지였을까요?

장사 수완이 좋았던 그녀에게 다가온 보위원

마순희: 맞습니다. 미진 씨의 경우 북한에서부터 남달리 장사 수완이 좋았던 분이었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진 씨는 여군으로 군인 생활을 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제대하게 되었는데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름대로 군사 복무 경험도 있고 돌아가는 세상 물정도 빠르게 파악을 하는 편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감이 좋다고 할까요? 제대 후 시작한 장사였는데 수완도 좋고 뭐든 시작하면 밑지는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밑천이 많지 않다 보니 처음엔 소소한 장사만 했는데, 어느 날 자금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미진 씨의 재능을 알아본 한 보위원이었습니다. 미진 씨에게 먼저 접근한 보위원은 장사 밑천을 대줄 테니 함께 일해 보자고 했다는데요. 북한에서는 그 보위원처럼 돈을 벌고 싶지만 불법이라 자기가 직접 나서지는 못 하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거든요.

김인선: 그런데 보위원이라고 하니, 혹시라도 장사가 잘 안 되면 더 큰 곤경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되는데요. 미진 씨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마순희: 일단 장사에 자신감이 있었던 미진 씨는 보위원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보위원은 큰돈이 되는 일이라며 마약이나 골동품을 중국과 거래하는 불법적인 일을 제안했습니다. 위험성은 컸지만 그만큼 벌이는 좋았습니다.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정말 큰돈을 만지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97년도, 98년도에는 중국에서 개, 염소 이런 것들을 사들여 가는 것이 열풍이었는데요. 미진 씨도 가축들을 직거래하다가 사기를 당하게 됐습니다. 예상하신 대로 그 압박감은 미진 씨에게 돌아왔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나자 형편없이 달라진 처지

장사밑천을 다 떼우게 되니 보위원이 매일 같이 미진 씨의 집에 찾아와서 깡패처럼 행패를 부렸고, 어머니는 미진 씨를 방 안에 가두어 놓고 밖에 내보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한 미진 씨는 빚부터 빨리 갚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매달 중국에 사는 친척이 북한에 오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통해 친척 방문 나온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밑천 삼아 장사를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미진 씨는 어머니 몰래 집을 빠져 나가 친구집으로 갔습니다. 미진 씨가 워낙 돈을 잘 버는 것을 알고 있었던 친구는 중국 친척에게 미진 씨를 소개해 주었고 그 사람은 흔쾌히 큰돈을 내 주었습니다.

김인선: 아니 이게 무슨 영화 같은 얘기인가요. 친구 보증으로 큰돈까지 빌려서 앞으로 장사만 잘 되면 되는 건데, 왜 제가 이렇게 불안할까요. 부디 제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네요.

마순희: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미진 씨도 그런 걱정을 했어야 했는데, 당시 미진 씨는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갚겠다는 자신의 제안이 마음에 들어서 흔쾌히 돈을 빌려주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일이 쉽게 풀리면서 기분 좋아진 미진 씨는 친구와 그 친척과 함께 저녁까지 먹게 됐고 중국술도 마시게 됐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친구집이 아니라 중국이었다고 합니다. 빌려주겠다는 돈은 미끼였고 인신매매에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빚 독촉을 피해 돈을 빌리려고 떠났던 걸음이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친구의 친척이 인신매매단에게 넘겨

고향 땅을 떠나게 된 미진 씨

친구의 친척이라는 사람이 미진 씨를 브로커에게 넘겼고 또 다른 브로커에게 인계를 해야 했기에 야단하는 미진 씨를 거의 감금하다시피 한 것입니다. 도망치겠다며 악도 써보고 울며불며 집에 보내달라고 사정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며칠씩 밥도 안 먹었더니 브로커가 ‘너 같이 비실비실한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집으로 보내줄 거다. 두만강이라도 건너려면 기운이 있어야 할 테니 우선 밥이라도 먹어라’ 하며 회유했습니다. 그 말을 믿고 미진 씨는 끊었던 곡기를 입에 넣었습니다. 며칠 지나 감금됐던 곳에서 나오게 됐고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던 택시는 미진 씨를 싣고 중국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갔고, 그 길로 미진 씨는 말 한 마디 모르는 중국 마을에서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살게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깊은 산골짜기의 한 농촌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가던 미진 씨는 우연히 북한에서 왔다는 한 여성을 알게 되고 서로 마음을 의지하면서 지냈습니다. 중국에서 그렇게 2년 넘게 지내다가 미진 씨는 그 여성과 함께 2007년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는데요. 당시 미진 씨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

김인선: 지금까지의 얘기만으로도 파란만장한 삶을 꽤 길게 산 것 같은데, 아직 20대였네요.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고, 무엇보다 북한 여성들의 강점이 강인한 생활력이잖아요. 미진 씨도 한국에 와서 대충 살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제과제빵사의 꿈을 안고 열심히 달렸지만…

마순희: 미진 씨의 생각도 같았습니다. 북한에서나 중국에서나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 꿋꿋이 견디며 살았으니 대한민국에서도 무엇을 하든 잘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진 씨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하면서 제과제빵사의 꿈을 갖고 교육도 받고 외국에서 유학까지 하고 왔다는 유명한 강사에게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기술도 배웠습니다. 자격요건을 갖추다 보니 서양음식점(레스토랑)에 취업도 바로 가능했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건강이 좋은 편이 못 되었던 미진 씨는 점점 그 일이 힘들었습니다. 몸만 힘든 게 아니라 지독히 외로운 마음까지 들면서 미진 씨는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인물이 괜찮고 예의 있는 남한 남성이 미진 씨에게 구애를 했는데 외로웠던 미진 씨는 크게 따져 보지도 않고 결혼승낙까지 했던 것입니다.

김인선: 든든한 동반자가 생겼네요. 남남북녀의 결혼생활이 미진 씨의 한국정착에 활력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미진 씨의 본격적인 한국생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