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23번 이사 다닌 여자의 꿈(1)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다가오는 신학기를 앞두고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맘 때 중, 고등학교 배정 발표가 나는데요. 보통은 집 근처 학교로 배정이 되지만, 원하는 타 지역 학교에 합격하거나 하면 이사를 결정하는 가정이 꽤 있더라고요.

마순희: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설레는 일인 것 같기는 해요. 생활이나 주거환경 등 무엇인가 변화를 줄 수도 있으니까요. 생활이 더 좋아져서, 혹은 회사를 옮겨서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이사를 많이 경험한 분들이 꽤 있어요.

김인선: 북한에서는 마음대로 이동하기도 어려우니까 이사 경험이 많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한국에서 이사를 많이 했다는 말인가요?

중국에서 23번 이사한 여자

마순희: 오래 방송을 하시다 보니 북한의 실정을 환히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북한에서는 이사를 자주하는 편은 아닙니다. 북한 사람들 중에서 이사를 많이 했다면 군관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부대의 이동에 따라서 늘 가족이 함께 이사를 가야 하거든요. 제 주변에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엄청 부럽더라고요. 우리는 태어나서 계속 한 자리에서만 살고 있는데 그 애는 이곳저곳에서 살아 봤잖아요. 여성들에겐 시집간다는 것이 한 번의 기회가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치 받은 거주지에서 쭉 살게 됩니다. 예외적으로 승진이나 조동(전근) 등 국가적인 이동은 가능한데요. 그런데 아무리 이사 경험이 많아도 이분처럼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릴 성공시대 주인공인데요. 한국에서 이사를 많이 한 것은 아니고 중국에서 지낼 때 23번이나 이사를 다녔던 경우입니다. 2000년에 한국에 입국한 김인희 씨에 대해 오늘 소개해 드려볼게요.

김인선: 23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면 중국에서 꽤 오랫동안 지냈을 것 같은데요. 인희 씨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마순희: 네. 인희 씨가 살았던 곳은 함경북도의 한 두만강변의 크지 않은 군 소재지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살아가기가 가장 힘들었던, 그래서 제일 많이 탈북을 했던 1998년, 인희 씨도 가족과 함께 탈북을 했습니다. 더는 그 나라에서 살 수가 없기에 남편과 함께 8살, 10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향한 것입니다. 인희 씨네 가족은 친척은 아니지만 풋낯이나 알던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고 소개와 소개를 거쳐 흑룡강성 치치할 지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학령기 두 아들이 학교에 안 가는 것을 의심하는 눈길을 피해야 했기에 인희 씨는 중국에 2년 8개월을 살면서 거주지를 23번이나 옮겨 다녔던 것입니다.

김인선: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셈이네요. 탈북민 누구나 중국에서 지내는 시간은 불안정하고 북송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낸다고 하지만, 인희 씨의 경우엔 거의 피난민처럼 지낸 것 같아요. 그 이유가 뭘까요?

중국에서의 피난민 같았던 삶

마순희: 아무래도 혼자가 아니라 가족 단위로 살았기 때문인데요. 홀로 탈북한 여성들의 경우에는 소개로 혹은 인신매매로 중국의 사회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기에 결과적으로 보면 가족이 함께 탈북한 분들보다는 덜 위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탈북민들 사이에서 가족을 동반한 중국 생활이 더 어렵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힘들게 일하고도 급여를 주어야 할 날짜에 제대로 주지도 않았고, 뭐라고 하면 당장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해서 억울할 때가 많았던 건 기본이고, 중국에서 혼자 숨어 지내는 것도 힘든데 가족 네 명이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아무리 숨어 살아도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고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한 인권단체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이라는 단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시로 사는 곳을 옮기며 중국에서 숨어 지낸 지 2년 반이 넘었을 때였습니다. 그분들은 인희 씨 가족에게 생활비 지원도 해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고 인희 씨는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한국행까지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에게도 무사히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희 씨의 두 아들 모두 10살도 안 된 때잖아요. 어린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여정인 만큼 준비를 탄탄하게 해야 할 텐데요.

마순희: 네. 3국을 경유해야 하고 한국행은 중국행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이 필요한데요. 인희 씨는 이번에도 한국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갈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 준 덕분에 인희 씨 가족은 여느 탈북민처럼 제3국을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하면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 입소하고 2개월가량 기본적인 생활교육을 받게 되잖아요? 인희 씨는 가족과 함께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았고 지내는 동안 크게 어려운 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십대의 두 아들은 하나원에서 생활하면서 근처의 초등학교에 다녔고 학교생활도 잘 적응했습니다. 하나원 교육을 마친 후 서울에 거주지를 배정 받았고 남편과 인희 씨는 일자리부터 찾았습니다. 인희 씨 남편은 하루 단위로 일하고 하루 단위로 돈을 받는 일용직이라도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면서 좋은 일자리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김밥집에서 시작한 그녀의 사회생활

두 아들의 교육비와 생활비 등 하루하루 돈이 필요했기에 인희 씨도 남편처럼 일용직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밥집에서 하는 부업이었는데, 아시는 것처럼 김밥을 싸려면 야채 손질부터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손이 빨라야 하잖아요? 인희 씨는 경력이 없다 보니 아무래도 서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이라 설거지한 그릇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도 몰랐는데 ‘그런 것도 모르냐, 채소 다듬는 것도 왜 이렇게 느리냐’며 김밥집 사장이 엄청 잔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처음 일하는 사람에게 배워주지도 않고 역정부터 내는 주인이 서운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인희 씨는 그 과정을 잘 견뎌냈습니다. 점차 일에 익숙해 갔고 나중에는 주방, 식당 내부, 계산하는 일까지 어디에 세워놓아도 막힘없었습니다. 사장님은 인희 씨를 신뢰했고 가게를 비우는 때가 있어도 전혀 걱정이 안 된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인희 씨가 신뢰받으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인 두 아들 모두 공부도, 학교생활도 큰 무리 없이 해 나간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이 되고 성장할수록 엄마의 손길을 덜 필요로 한대요. 그래서 엄마들에게 자유시간? 혹은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하는데요. 인희 씨에게도 그런 시간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정착 6개월 만에 겪은 황망한 죽음

마순희: 안타깝게도 인희 씨에게 그런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남편도 애들도 또 자신도 하루하루 잘 적응해 나가는가 싶었는데 큰 불행이 인희 씨 가족을 덮쳤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했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한국에 정착한지 겨우 6개월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가장을 하루아침에 잃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인희 씨는 두 아들을 두고 넋 놓고 슬퍼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인희 씨는 자신만 바라보는 두 아들을 위해서도 눈물을 힘으로, 용기로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인희 씨는 남편을 보낸 뒤 낮에는 손칼국수집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근처의 건물관리까지 두 가지 일을 병행했습니다. 건물을 관리하는 일은 열심히 사는 인희 씨의 모습을 보면서 칼국수집 사장님이 주선해 준 일자리로 일이 크게 힘들지 않으면서도 보수가 괜찮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인희 씨는 그 일을 14년 넘게 이어갔습니다.

김인선: 식당일부터 건물 관리까지 아무리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도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건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인희 씨는 14년 넘게 지속했다고 하니 얼마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두 아들도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을 나이인데요. 인희 씨의 고단한 삶에 작은 휴식처가 될 수 있었을까요? 김인희 씨의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갑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