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최근 전해지는 북한 소식 중에 농사문제를 단일 의제로 노동당 전원회의를 개최했다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그만큼 식량난이 심각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 새해 들어 잠시 도발을 멈췄던 북한이 다시 미사일 발사를 재개하자 한국에서도 한.미.일 연합훈련과 함께 경고를 보내고 있는데요. 이런 소식들이 탈북민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마순희: 네, 맞는 말씀입니다. 북한과 관련된 안 좋은 소식들을 전해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에 정착해 살아가는 탈북민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맞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회사생활을 하거나 여러 가지 소조 활동 등 한국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분들은 그런 감정을 더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제 주변으로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분들이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성공시대 주인공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2009년에 한국에 입국한 최재훈 씨인데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 한국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졌습니다. 북한 해군의 어뢰에 공격을 당해 남한의 천안함이 침몰했고 그 일로 46명의 장병들이 사망했기에 북한은 물론 탈북민들에 대한 감정까지 좋지 않았는데요. 최재훈 씨는 한국문화와 한국사람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시기에 탈북민을 향한 안 좋은 시선을 보내는 상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에
주눅 들었던 탈북민들
김인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분들도 잘 알지만 북한의 도발이 생길 때마다 가까이에 있는 탈북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게 된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주눅 들지 않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하고 한국 생활을 잘해내는 탈북민분들도 많은데요. 최재훈 씨가 그런 분이라는 거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최재훈 씨는 2009년 36살 때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하나센터에서 초기생활 정착교육을 받고 나온 후 곧바로 중장비학원에 다니며 자격증을 취득했고 취업도 바로 성공했습니다. 재훈 씨는 직장생활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은 물론 회사 내에 직원들이 함께 하는 여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데요. 점심식사 후나 주말을 이용해 족구를 즐기는 소조모임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최재훈 씨는 쉬는 날마다 족구소조(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회사동료들과 함께 땀 흘리며 친목을 도모해 나갔습니다. 운동이 끝나면 종종 회식자리를 통해 술 한 잔 기울이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허심탄회하게 나누기도 했었는데 1년도 안 된 2010년 3월에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탈북민 성공정착의 필수조건은 소조활동 ?
방송마다 천안함과 관련된 소식을 전했고 사람들도 모이기만 하면 천안함 얘기뿐이었습니다. 재훈 씨네 회사분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동료들이 북한에 대해 욕을 하다가도 재훈 씨가 나타나면 말을 끊었답니다. 최재훈 씨는 그 모습을 보면서 본인의 잘못도 아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운동 끝나고 함께 하던 회식자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술 한 잔 들어가면 서로 간에 속에 품었던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쏟아내곤 했는데 천안함 사건을 비롯해 북한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고 그럴 때마다 재훈 씨는 함께 분노하면서도 알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재훈 씨는 그런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고 솔직한 감정으로 동료들과 더 많이 어울리면서 소통을 해 나갔습니다. 그 후 동료들도 그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것을 즐겼고 최재훈 씨 역시 주눅 들지 않고 잘 정착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사회성이라고 하잖아요. 최재훈 씨의 경우 그런 사회성이 정말 탁월하신 분 같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과 통솔력(리더십)은 숨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최재훈 씨 스스로도 자신의 최고 강점을 예전의 지위나 명예를 다 내려놓은 것을 꼽는데요. 사실 최재훈 씨는 북한에서 잘 나가는, 전혀 탈북이라는 단어와는 연결 지어지지 않을 직업과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3대혁명소조는 북한의 권력구조에서 첫 자리라 할 수 있는데 최재훈 씨의 경우 큰 기업소의 3대혁명소조로 사업했고 중앙당 간부학교 추천 문건까지 올려 보낼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재훈 씨는 한 순간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2008년 12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게 됐습니다.
한 순간에 도망자 신세가 된 북한 간부
어쩌면 불행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최재훈 씨는 양강도 혜산에서 살았는데 지역의 특성상 주민들 상당수가 중국과 불법 거래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재훈 씨 역시 자의든 타의든 그런 일에 관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대학 선후배나 지인들 중에 한국에 간 사람들도 많다 보니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과 전화 연결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고 돈을 전달해 달라거나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들을 많이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훈 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자신의 힘과 인맥을 동원해서 그런 일들을 처리해 주었습니다.
김인선: 도움을 주지 않고 부탁한 사람을 고발할 수도 있었잖아요. 무엇보다 그런 일들을 처리해주다가 자칫 발각이라도 되면 북한 내에서는 그동안 누렸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잃거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최재훈 씨가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한에서 힘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먹고 사는 게 거의 유행이다 보니 재훈 씨도 조금 불안하기는 했었지만 수락했다고 합니다. 부탁해오는 사람들도 알고 지내던 처지다 보니 모른다며 외면할 수도 없었고, 또 그런 일들을 해주고 받는 수수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쉽게 벌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이었기에 자연히 능력껏, 수단껏 관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에서 돌아가는 유행어가 있었는데요. '안전원은 안전하게 해 먹고 보위원은 보이지 않게 해 먹고 당 일꾼은 당당하게 해 먹는다'는 말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불법 행위를 한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일컫는 말이 돌 정도로 부패했던 것입니다.
안전원은 안전하게 해먹고
보위원은 보이지 않게 해먹고
당 일꾼은 당당하게 해먹는다 ?
물론 그러다가 들키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들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최재훈 씨는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다는데요. 우려대로 불행한 일이 예고도 없이 찾아 왔습니다. 2008년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부탁을 해왔습니다. 송림시의 모 대학에서 강좌장을 하던 분이 식구들을 데리고 탈북했는데 두 딸이 아직 북한에 남아있기에 전화통화로라도 연결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친구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두 딸의 생사조차 몰라서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사연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맥으로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주선을 했는데 현장에서 발각이 되었습니다. 강좌장의 두 딸의 경우 이미 가족이 다 한국으로 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감시대상이라 미행을 달고 왔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나갔던 최재훈 씨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현장체포가 되었던 거죠. 이 일로 재훈 씨는 2개월여의 보위부 감금과 조사를 거쳐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김인선: 앞서 재훈 씨가 했던 일이 발각되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다고 표현을 했을 만큼 엄중하게 다뤄진다는 의미일 텐데요. 그에 비해 최재훈 씨는 그나마 가벼운 형량을 받게 된 것 같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돈과 권력이면 해결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에 재훈 씨는 인맥을 동원했고 뒷돈을 주고 병보석을 받아서 풀려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더는 자신과 가족의 앞날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재훈 씨는 한국행을 결심했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지 3일 만에 탈북을 감행했습니다.
김인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탈북해도 그 여정이 쉽지 않은데, 재훈 씨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탈북을 하게 되었는데요. 한국까지의 여정과 못 다한 한국정착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김인선,에디터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