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최재훈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북한에서 간부 후보자로 거론될 만큼 전도유망했던 분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 탈북을 하게 됐다고 했었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최재훈 씨는 2008년 12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탈북했는데요. 불과 몇 개월 전에만 해도 사람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던 자신이 도망자의 신세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양강도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혜산농림대학을 졸업하고 꽤 큰 기업소의 3대혁명소조로 사업을 했던 재훈 씨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중앙당 간부학교에 추천 내신 문건을 상급 당에 제출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간부 후보자였는데 지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일을 도와주다가 발각이 되면서 재훈 씨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탈북민 가족 돕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간부 후보자
최재훈 씨의 대학 선후배나 지인들 중에는 한국에 간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재훈 씨에게는 인맥과 힘이 있다 보니 그에게 북한에 있는 가족과 전화 연결을 부탁하거나 돈을 전달해 달라거나 또 사람을 찾아달라는 부탁들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알고 지내던 처지에 외면할 수도 없었고 그에 따른 수수료도 만만치 않아서 재훈 씨는 그 일을 했습니다. 불법 행위였지만 북한 내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먹고 사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재훈 씨도 능력껏 수단껏 관여하게 되었는데요. 탈북민이 있는 가족을 도왔다가 현장에서 체포 되었고 2개월 여의 보위부 감금과 조사를 거쳐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돈과 권력이면 해결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에 재훈 씨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했고 뒷돈을 주고 병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북한에서 더는 자신과 가족의 앞날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집으로 돌아온 지 3일 째 되는 날, 감시의 눈을 피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그동안 중국과 연계가 많았던 터라 브로커와 쉽게 연결이 됐고 태국을 통해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김인선: 북한 내에서 본업 외에 진행했던 일부터 탈북과 브로커 연결, 최종적인 한국행까지 모든 것이 재훈 씨의 인맥이 큰 역할을 했네요. 설마 한국에도 재훈 씨의 다양한 인맥이 존재했을까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재훈 씨의 경우 한국에 먼저 정착한 지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정착하는데 자신의 인맥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탈북민들의 지역사회 정착을 도와주는 하나센터와 먼저 정착한 선배들의 도움이 컸고 북한에서의 자신의 지위나 명예 등을 다 내려놓은 것이 성공적인 한국 정착의 비결이었다고 합니다. 재훈 씨는 한국에 온 만큼 북한에서의 생각은 다 잊고 한국에서 잘 정착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탈북 남성이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는 비결
사실 북한에서 한 자리 했던 남성들의 경우 한국에서 정착하는 동안 더 큰 어려움을 겪는 편입니다. 북한에서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많이 편하게 잘 살았고 웬만한 과오가 있어도 뒷사업을 해서 다 무마시키기도 했기에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었는데 한국에 오니 자기보다 못 살았던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원 생활부터 같은 출발선에서 새롭게 정착을 시작해야 했으니 한국생활이 못마땅하거나 싫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시만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경우도 생기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힘들고 정착이 힘들었을 것도 같거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최재훈 씨를 비롯해서 북한에서의 모든 지위나 명예, 그리고 누려왔던 모든 특권들을 다 내려놓고 한국에서 잘 정착하는 분들을 보면 좀 더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재훈 씨는 처음 하나원 교육부터 열심히 필요한 교육을 받았지만 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잘 될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거주지를 대구로 정한 후 곧바로 중장비학원에 들어가서 포크레인, 지게차, 로드까지 3개의 중장비 국가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포크레인은 북한에서는 엑스까와또르 흔히 까또라고 하는 기계고 로드는 불도젤이라고 부르는데요. 지게차는 짐을 싣고 부리우는 작업을 하는데 저는 북한에서 그런 기계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중장비 자격증이 많아도
탈북민의 취업은 어렵다?
김인선: 중장비 운전 시 특수한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자격증 취득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필기시험도 봐야 하고 실기시험까지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번 도전해서 겨우 땄다고 하는 분들이 많던데 최재훈 씨는 너무 쉽게 자격증을 취득하신 것 같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한국에서는 외래어 사용이 많아서 힘들긴 했지만 북한에서 명문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혜산농림대를 졸업한 재훈 씨에게는 용어가 서로 다르긴 해도 그리 힘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들보다 수월하게 학원을 다니고 졸업도 하고 자격증까지 빨리 취득했지만 해당분야에 취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재훈 씨가 발품을 팔아 취업한 곳은 하루 단위로 일하고 하루 단위로 돈을 받는 일용직이었는데요. 너무 힘든 회사라 두 달 만에 사직하고 새로운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은 했지만 30대 후반의 재훈 씨는 신입사원이었고 회사의 막내였기에 회사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김인선: 30대가 아니라 40대라도 현장경험이 없거나, 그 경험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사회초년생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보조 일부터 성실하게 하면서 스스로를 증명해 내는 수밖에 없는데요. 북한에서부터 관련된 공부도 했고 관리자 입장이었기 때문에 하급자 과정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북한에서는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큰 회사에서 모든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그에게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회사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강점을 과거의 위치를 내려놓은 것이라고 할 만큼 재훈 씨는 성실함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회사를 찾았고 자동차 부품을 만들어서 납품하는 신생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회사업무를 이해하거나 용어를 익히는데 시간은 좀 걸렸지만 기술 분야에서 막힘이 거의 없었고, 성실하고 회사의 창립 구성원이기도 한 재훈 씨는 입사 후 1년 지나서는 대리로, 4년 차에는 과장으로 승진되어 회사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받으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회사의 핵심 인사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으며 재훈 씨는 개인 사업을 해 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는데요. 2년 전, 48살 때 개인 운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톤 트럭으로 운송 영업을 하는 것인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쌓아 놓은 인맥 덕분에 처음부터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같은 탈북민 여성을 만나 가정도 꾸렸습니다. 개인 영업을 하다 보니 본인이 스스로 일정과 업무량을 조절할 수 있어서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하는데요. 수입도 회사 다니는 것보다 짭짤하다고 하더라고요.
가끔 재훈 씨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요. 늘상 ‘한 번 뿐인 인생 행복하게 즐기자’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자신만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성공적인 정착이라는 최재훈 씨의 이야기는 다른 탈북민들의 정착 의지를 북돋아 주고 안정적인 기반 마련의 길잡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늘도 자신이 선택한 제2의 삶을 당당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최재훈 씨의 희망찬 운송길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김인선: 탈북민에 대한 편견의 시선이 있을 때에도 사람들을 피하는 대신 더 많이 만나고 부딪혔던 최재훈 씨.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당당한 자신감으로 정면 돌파하며 살아왔기에 행복하게 즐기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