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엄마들의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전국 학교마다 열리는 학부모총회 때문인데요. 학부모총회에서는 학교운영 계획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요. 아이를 맡은 담당 교원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다른 엄마들과 교류를 할 수 있어서 꼭 참석하는 자리거든요. 자기 아이를 위해서라도 옷차림을 어떻게 하고 갈지, 어떤 머리 모양으로 갈지 고민하는 엄마들의 마음, 탈북여성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남한이나 북한이나
자녀를 위하는 엄마 마음은 똑같아
마순희: 맞습니다. 자녀를 위하는 마음 하면 우리 탈북여성분들도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거의 모두가 자녀들을 위해 살아 왔다고 말할 정도로 자식사랑이 지극한데요. 오직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목숨을 내건 탈북을 단행했다는 가슴 뜨거운 사연들도 많습니다. 오늘 성공시대의 주인공도 그런 분들 중 한 사람입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이 가장 어려운 때였던 1998년에 남편과 세 자녀들을 데리고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거주하다가 2005년에 한국 서울에 정착하게 된 한기주 씨인데요. 기주 씨는 세 자녀 모두를 한국에서 누구나 다 자녀들을 보내고 싶어하는 명문대학에 보냈고 자녀들 모두 지금은 졸업 한 후 자기 분야에서 당당하게 멋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인선: 한국 엄마들 사이에서는 명문대학은 바라지도 않고 인서울, 그러니까 '서울 안에 있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 기주 씨는 세 아이 모두를 명문대에 진학시켰다고 하니 그녀의 자녀 양육법이 궁금합니다. 남북한의 교육문화가 달라서 몇 살 때부터 한국 교육을 받았는지도 꽤 영향이 있으니까요. 또 자녀가 중국에서 나고 자란 경우 언어의 문제도 있잖아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먼저 교육 분야에서 탈북민들에 대한 대한민국의 교육 혜택에 대해서 청취자분들에게 알려드리고 싶은데요.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35세 미만까지는 국공립대학에서 입학금, 수업료 및 기성회비 등 전부를 면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대학들에서 북한이탈주민 특례가 있어서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 입학하기가 용이하고요. 다만 입학 후 대학생활을 끝까지 잘 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거죠. 기주 씨의 자녀들도 이런 탈북민 혜택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 한기주 씨 가족은 함경북도 두만강 연안의 작은 소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중국에 사는 친척들이 장사 목적으로 자주 북한으로 나왔었기에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지낼 수 있었고 덕분에 기주 씨 가족은 중국에 대해서 여느 북한 주민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국행을 생각했을 겁니다. 실제로 기주 씨 남편이 중국에 먼저 들어갔고 8개월 후 다시 북한에 나와서 기주 씨와 당시 10대의 어린 자녀들 모두를 중국으로 데려왔습니다.
가족 모두를 탈출시키기 위한 아빠의 노력
김인선: 가족 모두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자녀들까지 다 데려왔을 것 같은데요. 기주 씨 남편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었을까요?
마순희: 네. 기주 씨 남편이 8개월을 중국에서 지내면서 생각했던 묘안은 중국 깊은 산골에서 지내던 조선족이 자녀 교육 때문에 시내에 나온 사람으로 위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주 씨 부부는 숨어 지내면서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무난히, 그리고 무사히 지내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북한으로 끌려 가는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처음엔 영문도 몰랐지만 후에 알고 보니 숨어 살던 기주 씨네 가족을 시기해서 누군가가 고발을 했고 그 일로 남편이 북송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기주 씨는 남편을 위해 그동안 모았던 돈을 모두 브로커를 통해 북한에 내보냈고 어렵사리 남편을 빼 낼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7년 넘게 살았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숨어 산다고 해도 언제 잡힐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기주 씨 부부는 남편의 북송을 계기로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자녀들 모두 10대로 어렸고, 온 가족이 함께 한국으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에 무조건 가야 한다는 것이 기주 씨 부부의 선택이었습니다.
부모가 겪는 시련을 보며
순종적으로 잘 자라준 아이들
김인선: 아이들은 7년 동안 중국에서 지내는데 익숙해졌을 텐데… 자녀들은 부모님의 결정에 말없이 잘 따랐을까요?
마순희: 네. 북한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자녀들 모두 엄마, 아빠의 결정에 잘 따랐습니다. 타국에 숨어 살면서 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북송되는 시련까지 겪었던 터라 세 자녀들은 무조건 부모님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신변 보장이 안 된 탈북민이기에 언제고 북송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윁남(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한국까지 오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기주 씨 가족 모두가 무사히 2005년 대한민국 땅을 밟았습니다. 탈북민 초기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친 후 기주 씨 가족은 서울 가양동에 거주지를 배정받고 한국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새로운 곳에서 정착을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회사와 학교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하거든요. 회사까지 가는 버스나 지하철 노선을 확인해야 하고 근처에 아이가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알아봐야 하니까요. 저도 작년에 이사를 했는데 집 근처에 어떤 식당이 있는지, 생활용품 파는 상점이나 아이 학용품 살 수 있는 문구점이 어디에 있는지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살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주 씨의 경우엔 아이가 셋이라 알아봐야 할 것도 신경 쓸 것도 더 많았을 것 같아요.
탈북 가족의 첫 사회경험
마순희: 네, 맞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기에 신경 쓰고 알아봐야 할 것이 더 많게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탈북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지원이 있잖아요? 기주 씨 역시 거주지역의 복지관 직원들, 정착도우미들, 수많은 봉사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정착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한국 일반교육 과정의 학교에 진학을 시켰습니다. 중국에서 숨어 살면서도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시내에 나온 것으로 가장하고 살았었던 덕분에 세 자녀들 모두 중국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원 공백기가 거의 없어서인지 한국에서도 학교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부터 맞벌이 부부로 생활해왔던 기주 씨 부부는 한국에 정착하자마자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남편은 한 대학의 도서관에서 계약직으로 취직했고 기주 씨는 식당 부업 일을 시작했습니다. 식당 주방 보조로 두어 달 정도 근무했을 때쯤 복지관에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고 하는데요. 지역의 한 대형상점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도록 연결해 준 것입니다.
김인선: 적어도 계약기간 동안만큼은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됐네요. 대형 상점의 경우 성실하게 일을 잘하면 관리자들의 평가를 거쳐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이 될 가능성도 있거든요.
마순희: 맞습니다. 탈북민들 중에도 처음엔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착실함과 근면, 성실한 직장생활로 정식 직원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기주 씨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업무가 몸에 익어 어느 정도 적응되어 가고 있을 때 기주 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직원들의 파업이 일어났고 그 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동 조건의 유지와 개선을 위해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작업을 중지하는 파업이 종료된 후에도 정규직 사원들은 제 자리에 복귀가 되었지만 기주 씨처럼 일용직의 경우엔 회사에 복귀할 수 없었던 거죠.
김인선: 지금은 비정규직을 위한 노동 여건도 많이 개선되었지만 기주 씨가 한국에 입국했던 2005년도에는 비정규직의 경우 정규직에 비해 임금은 낮고 해고는 더 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인데요. 기주 씨가 어떻게 한국 정착을 이어갔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