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부자 중의 부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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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한기주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기주 씨는 가족 모두가 함께 한국에 입국한 경우였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한기주 씨는 두만강 연안의 작은 소도시에서 살다가 남편이 먼저 1998년 남편이 먼저 중국으로 갔고, 살 방안을 모색한 남편이 8개월 후에 기주 씨와 세 자녀까지 중국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기주 씨 부부는 깊은 산골에서 지내던 조선족이 자녀 교육 때문에 시내에 나온 사람으로 위장해서 지냈는데요. 중국에서 거의 7년을 잘 살아가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기주 씨 남편이 북송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모아 놨던 돈으로 남편을 빼내올 수 있었지만 그 일로 기주 씨 부부는 한국행을 결심했고 2005년 세 자녀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탈북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지원 덕분에 기주 씨네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학업을 이어갔던 세 자녀였기에 한국 학교생활도 잘 적응했고 기주 씨 부부는 북한과 중국에 이어 한국에서도 맞벌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한 대학의 도서관에서 계약직으로, 기주 씨는 식당 부업을 하며 경제활동을 한 것입니다.

온 가족 탈북 그후

김인선: 기주 씨 부부는 한결같이 성실하게 사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세 자녀가 있다 보니 남들보다 더 빨리 일자리를 찾고 돈을 벌어야 했을 텐데요. 좀 더 안정적이거나 로임이 더 많은 일을 찾지는 않았나요?

마순희: 물론입니다. 기주 씨는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는 식당 일보다 좀 더 나은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식당 주방 보조로 두어 달 정도 근무했을 때쯤 복지관에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는데, 집 가까이에 있는 대형상점 계약직이었습니다.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해도 착실함과 근면, 성실한 직장생활로 정식 직원이 된 경우가 많다고 해서 기주 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요. 기주 씨에게 정직원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주 씨의 뜻과 상관없는 직원들의 파업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작업을 중지하는 파업으로 정직원들은 노동 조건의 유지와 개선의 혜택을 받았지만 계약직원들은 원래 자리로 복귀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주 씨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원에서 알게 된 지인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꽤 규모가 큰 신발 유통회사였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계약직이었지만 성실하게 일하다 보니 6개월 이후부터는 정규직으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급여는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탈북민 여성들을 많이 생각해 주었습니다. 회사에서 탈북민을 고용하면 정부에서 회사 측에 매월 고용지원금 380달러(50만원) 정도를 지급하는데 그 돈을 대부분 회사 차원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기주 씨가 입사한 신발 유통회사에서는 지원되는 고용지원금 모두를 탈북민들에게 주면서 회사에 잘 정착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40대 탈북민의 취업 실태

김인선: 인터넷 활용도 잘하고 전자기기 다루는 법을 빨리 배우는 젊은 사람들의 경우엔 다양한 채용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그렇지 못하더라고요. 기주 씨의 경우 40대 후반에 한국에 왔으니까 젊은 편에 속하긴 하는데요. 탈북민 뿐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4-50대들의 경우 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그런데 기주 씨는 용케도 금세 일자리를 찾았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기주 씨의 경우에는 하루벌이로 일하는 일용직이든 정규직이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떤 일이든지 성실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기에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다들 일자리 주선도 잘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신발 유통회사의 근무 시간은 오전 8시 반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는 긴 시간이었지만 기주 씨는 일이 힘들지 않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성실히 일했기에 경제적으로 쫓기는 상황은 아니었고 기주 씨에게 돈을 반드시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기주 씨는 직장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세 자녀들이 아빠,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도 서로 도와 가면서 해 주고 있었고 공부까지 잘 하니 기주 씨는 큰 걱정 없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탈북민 대학등록금 지원으로

세 자녀 모두 명문대학 졸업해

기주 씨 부부는 교육비에 대한 부담도 없었습니다. 세 아이 모두 학원이나 과외를 한 적도 없이 스스로 공부한 덕분입니다. 북한에서부터 아이들이 영특했는데 중국에 있을 때도 학교를 다녔기에 교육의 공백이 없었던 것도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선생님이 되어줬다고 하더군요. 모자란 부분을 서로 채워주며 세 아이 모두 협심하여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기주 씨 맏딸은 성균관대, 아들은 서강대, 그리고 막내아들은 한국 외국어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세 자녀 모두 대학에 다니면 1년에 2만 달러가 넘는 대학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탈북민 지원정책으로 모두 나라에서 보장해 주고 해마다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어서 학비에 대한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대학생이 된 세 자녀들은 부모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부업을 하면서 용돈벌이까지 했다고 하니 심적으로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집안이 평안하니 직장생활도 순탄했습니다. 기주 씨에게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벌 수 있는 곳만이 아니라 위로와 의지의 공간, 함께 소통하고 보람을 느끼는 수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잠깐 엇나가기도 하고 이런저런 자녀와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은데 기주 씨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 같아요. 어쩜 세 자녀 모두 그렇게 반듯하게 성장했는지, 주변에서 기주 씨를 많이 부러워하겠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한국에 정착할 때 큰 딸은 20세, 아들은 18세, 막내아들은 13세였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 사춘기도 순탄하게 보내고 세 자녀 모두 말썽 한 번 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맏딸은 성균관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서 사업하고 있는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고 서강대, 한국외대를 졸업한 두 아들도 회사를 꾸려서 함께 사업을 해 나가고 있어서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부러워하고 있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비법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그때마다 기주 씨는 아이들이 착하고 알아서 다했다는 말만 반복하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훌륭한 사람들 뒤에는 늘 훌륭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기주 씨의 세 자녀 모두 잘 자란 데에는 기주 씨와 남편의 노력을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진실되고 성실한 삶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거울이 되고 본보기가 됐을 테니까요.

기주 씨 부부는 66세의 나이에도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세 자녀가 주는 용돈과 그동안 모아둔 돈도 있어서 경제활동을 굳이 안 해도 되는 상황이지만 정년퇴직 후 기주 씨 남편은 건물 관리를 하면서 지금도 현직으로 근무하고 있고 기주 씨는 지금 대형 건물의 관리원으로 5년 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기주 씨는 이런 말을 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신이 노력한 것만큼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나라이기에 성공적인 정착 여부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살려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거죠. 자식이 잘 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며 보람이라면서 오늘보다 더 좋아질 내일을 위해 오늘도 온 가족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한기주 씨 가족을 응원합니다.

김인선: 한기주 씨의 세 자녀 모두가 명문대에 갈 수 있었던 비결은 기주 씨 부부의 진실되고 성실한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네요. 기주 씨의 삶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