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암을 이겨내고 제 3의 인생을 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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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영선 씨에 대한 이야기, 나눠볼게요. 영선 씨는 한국에 정착한지 9년이 되던 해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2년간 투병생활을 했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여성들에게 발병되는 암 중에 유방암 발생률이 가장 높은데요. 초기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관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정부에서는 비싼 진료비 때문에 질병이나 부상을 당하고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의료비를 지원해주는 국민건강보험이 있고 누구나 부담없이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무료 건강검진 제도가 운영 중이지만, 아프지도 않은데 일부러 시간을 내서 검사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영선 씨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가슴의 통증이 심해진 후에야 영선 씨는 뒤늦게 병원을 찾았고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날로 입원하고 바로 수술도 받으며 치료를 시작했지만 암세포가 다른 부위로 전이되면서 2차 수술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힘든 치료로 예민해진 영선 씨의 투정을 이해하고 치료과정을 함께 해 준 가족이 있었기에 영선 씨는 포기하지 않고 병마와 싸워 이겨낼 수 있었고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2년 동안 멈췄던 영선 씨의 일상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고 했는데요. 아프기 전의 일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탈북민을 무장공비로 여기던 시절

마순희: 네. 영선 씨는 2000년에 한국에 입국해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컴퓨터 공부부터 시작하면서 다양한 컴퓨터 활용법을 익혔고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정착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탈북민에 대한 인식은 낯설고 편견이 심했는데요. 탈북민과 무장공비를 동일시 하면서 개인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격요건을 갖춰도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단순노동하는 일자리만 가능했습니다. 영선 씨가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곳은 보험회사였는데요. 보험상품을 중개하는 보험설계사 일이었습니다. 미래의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나 사고를 대비해서, 개인의 여유자금을 투자해 놓고 사고가 난 이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보험인데요. 보험설계사는 고객마다 맞춤형으로 적합한 보험상품을 만들어서 판매하게 됩니다. 다양한 항목에 대한 설명을 통해 보험상품을 판매해야하는 영업직인 거죠. 보험설계사는 계속 사람을 만나야 하고 다양한 보험 항목에 대한 설명도 막힘없이 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무엇보다 고객 한 사람, 한사람 설득하여 보험에 가입시켜야 하는 만큼 언변도 좋아야 합니다.

하지만 영선 씨의 경우 아는 사람이 하나원 같은 동기나 주변의 탈북민들이 전부였기에 보험 영업은 더 힘들었습니다. 보험설계사는 매달 고정 급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험을 판매한 만큼의 수당을 받는 직종이기 때문에 시작하기는 쉬웠지만 능력에 따라 벌이가 다르다 보니 금방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영선 씨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고객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적합한 보험상품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고 고객관리에도 신경썼습니다. 그렇게 보험회사에서 2년 여의 시간을 열심히 일했지만 영선 씨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됐고 결국 보험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한국에 제대로 정착하려면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영선 씨는 아파트 경리학원을 통해 세무회계 1급 자격을 취득했고 인터넷을 활용해서 강의를 수강하고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세무회계학 학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세무회계 자격증을 취득했어도

취업이 어려운 탈북민

김인선: 세무회계라는 굉장히 어려운 전문분야 공부도 하고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으니까 취업에 필요한 자격요건은 충분한데요.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내에 탈북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 있었거든요. 혹시 영선 씨가 실망하는 일이 생겼을까요?

마순희: 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자격증도 취득하고 공부도 더 한 만큼 영선 씨는 취업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데요.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영선 씨는 경리학원을 졸업한 후 구직자들이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고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노동부 고용안전센터 직원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다녔는데요. 예전과 마찬가지로 번번이 거절을 당했습니다. 당시 탈북민들을 고용하는 회사에는 정부차원에서 매달 고용지원금 약 380달러(50만원)를 지급하기에 노동부 직원은 가는 곳마다 그 이야기를 전달했습니다. 탈북민을 고용하면 정부의 지원금이 있기에 적은 임금을 주고 사람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회사를 설득시켰지만 탈북민 직원 채용을 환영하는 회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선 씨는 탈북민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끈질긴 노력 끝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세무 담당 경리로 취직했습니다. 3개월 수습기간 동안 일을 시켜보고 결정한다는 조건부 취업이었지만 영선 씨는 열심히 일했고 3개월 뒤 직원으로 채용됐습니다. 이영선 씨는 회계와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배우며 경력을 쌓았고 2년 반 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한 후 퇴사를 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계약직으로 채용이 됐다 하더라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면 재계약이 가능하거든요. 영선 씨가 2년 반 만에 퇴사를 하게 된 부득이한 이유가 있을까요?

“배움이 정착의 가장 빠른 길”

마순희: 네. 사실 영선 씨가 처음 근무하던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영선 씨가 살던 거주지와 거리가 멀어 출퇴근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는게 어려웠던 영선 씨였기에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고맙다며 입사했고 주어진 업무도 수월하게 해냈습니다. 2년 반 동안 아파트 관리와 관련한 회계 업무를 충분히 익히면서 자신감이 생긴 영선 씨는 계약기간이 끝나자 바로 사직을 결정했고, 더 나은 근무 환경과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영선 씨는 '배움이 정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합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의 업무 경력으로 재취업은 수월했고, 장소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업무였기에 근무하는데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순조롭고 술술 풀리는 것 같았던 이때에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김인선: 안정된 직장에 가정도 꾸리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던 영선 씨에게 너무도 청천벽력이었겠어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행이었지만 영선 씨가 너무도 잘 극복했잖아요?

마순희: 네. 맞는 말씀입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암은 치료 후 5년이 경과했을 때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 판정을 내린다고 합니다. 이제는 영선 씨가 암을 극복한 지도 10년이 훨씬 지났으니 완전히 완치되었다고 봐야겠지요. 영선 씨는 2년간의 투병 후 원래 자리,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업무를 하는 것으로 복귀했고, 지금까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능력 있는 과장이 되었고 엄마의 투병 과정을 지켜봤던 어린 아들은 다 자라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또 남편은 아파트 대단지의 관리를 담당하는 관리사무소에서 80여 명을 통솔하는 기술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비슷한 분야에서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를 해주며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영선 씨 가족의 모습은 우리 탈북민들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김인선: 불행을 이겨내려는 마음과 배움으로 영선 씨는 건강과 일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던 거네요.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영선 씨를 통해 배워봅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