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 상담은 탈북민에게 맡기세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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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4월 25일은 제61회 법의 날입니다. '법의 날'을 맞아 대한변호사협회와 법무부가 지난 18일부터 25일까지 대국민 무료 법률상담을 진행했는데요.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거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서로 의논하는 '상담'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집니다. 일자리 상담, 수출 상담, 대출 상담, 주택 매입 상담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요. 탈북민들도 한국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상담을 받기 시작하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사실 북한에서는 상담이라는 말 자체도 몰랐었는데, 한국에 와서 처음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생활하며 상담이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원은 우리 탈북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상담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직업 선택을 위한 자신의 성향을 알아보는 적성검사도 하고, 미술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말 그럴듯하게 알아맞히는 미술심리상담 같은 것도 처음 접했었기에 지금도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됩니다. 처음 만난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어느새 자신의 어려움이나 말 못하던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게 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존경스럽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하나원을 퇴소해 사회에 나와 보니 상담이라는 게 분야마다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심리 상담이나 진로 상담 등 개인적인 문제나 고민 뿐 아니라 법적인 문제들까지 해결해 주는 법률상담은 물론이고 주민센터 같은 공공기관, 크고 작은 기업들에서는 전화나 콜센터를 통해 고객들의 문의 사항이나 불편함을 해소하는 전문 상담사들을 두고 고객들과 소통을 하면서 운영해 나가더라고요. 제 눈에는 그 모습들이 너무 새로웠습니다.

우리 탈북민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에도 콜센터 상담실이 있어서 정착금 지급, 창업지원, 교육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상담이 가능했고, 탈북민들의 지역 적응을 돕는 하나센터 역시 탈북민 전문상담사가 있어서 정착에서 제기되는 궁금한 문제들을 모두 알려주고 해결할 수 있는 방도와 기관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탈북민들은 전화상담 뿐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상담을 받기도 하는데요. 정착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상담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 우리 탈북민들인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상담 일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도 상담사로 활약을 했던 분입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한때 경상남도 마산 가정상담센터에서 상담사로 근무했던 고미숙 씨인데요. 2007년에 한국에 입국해서 올해로 한국생활 18년 차인 미숙 씨의 삶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김인선: 마 선생님께서도 의료상담사를 시작으로 남북하나재단 탈북민 전담 상담사까지 상담 일을 몇 년 하시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시잖아요. 미숙 씨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 예상이 맞을지 찬찬히 들어보겠습니다. 2007년에 한국에 입국한 고미숙 씨, 그전엔 어떤 삶을 살고 계셨을까요?

마순희: 네. 미숙 씨는 전형적인 탈북 여성으로 살아온 분이셨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 여성들 대부분이 고난의 행군 이후로 먹고 살기 힘들어져서 북한을 떠났거나 남편의 사망으로 생활이 어려워져서 북한을 떠나기도 하는데요. 미숙 씨의 경우 남편이 간경화로 사망한 후 탈북을 하게 됩니다. 미숙 씨 혼자 힘으로 두 딸과 가정을 위해 아글타글 노력했지만 생활은 점점 힘들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오빠와 남동생이 연락을 해왔는데 한국에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미숙 씨에게도 한국행을 권했는데요. 남편의 사망 후 3년 동안 아무리 애써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던 터라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온 식구가 사라지면 위험할 것 같아서 미숙 씨가 먼저 중국에 들어가고 두 딸이 뒤따라오기로 약속했습니다. 미숙 씨는 예정대로 무사히 중국에 도착했는데 딸들의 탈북이 지연됐습니다. 미숙 씨는 딸들을 기다리며 3개월을 중국에서 숨어 살아야 했는데요. 다행히 뒤늦게라도 두 딸 모두 중국에 올 수 있었고, 다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가족 모두가 무사히 한국에 입국한 만큼 미숙 씨가 한국 정착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북한에서처럼 먹고 사는 문제, 자녀들 교육까지 미숙 씨 혼자 다 책임져야 하지만 한국에서는 탈북민 지원 정책 뿐 아니라 한부모 가정 지원도 있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남편이 사망 후 모든 것이 미숙 씨 혼자 헤쳐 나가야 할 문제였지만 한국에서는 달랐습니다. 먼저 정착한 오빠와 남동생도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어서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지역사회에서도 한부모 가정이라고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 주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합니다. 한부모 가정의 경우 양육비가 지원되는데요. 일반적으로는 18살 미만의 자녀까지만 지원되지만 고등학교 이하 재학 중인 경우라면 22세 미만 자녀까지 지원이 추가됩니다. 미숙 씨의 두 딸의 경우 한국 입국 당시 큰 딸이 19살, 작은 딸이 16살이었기 때문에 양육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 딸은 한국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미숙 씨는 식당에서 부업을 하는 것으로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미숙 씨가 한국에서 정착을 시작한 곳은 형제들이 살고 있는 경상남도 마산이었는데요. 거의 직행으로 한국으로 오다 보니 모든 것이 생소했고 말투부터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특히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미숙 씨가 멀미를 심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심한지 버스를 타면 20분인 거리를 한 시간을 걸어서 다녔다고 합니다. 부업으로 다니는 식당까지 버스를 타지 못 하고 미숙 씨는 늘 걸어서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점차 나아져서 버스를 타게 되긴 했는데 이번엔 버스 노선이 많아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서 가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도 했다더군요. 그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숙 씨는 익숙지 않은 가스 불을 켜는 것도 무서워서 켤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고 했는데요. 저 역시 겪었던 일들이라 정말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김인선: 처음엔 당장 돈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일하는 탈북 여성들이 많죠. 하지만 사회생활에 적응이 좀 되면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미숙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네. 다행히 미숙 씨는 몇 개월간 식당에 다니다가 고속도로 요금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의 통행 요금을 요금소에서 받는 단순노동이었는데요. 미숙 씨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통행 거리에 따라 정산기기에 뜨는 숫자대로 요금을 받는 일이었는데, 자동차 종류에 따라 통행 요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차종을 분간하는 것이 어려웠고 잠깐 스치는 운전자들과의 대화도 함경도 사투리나 억양이 강해서 말투가 친절하지 못 하다고 민원을 받기도 했다는데요. 그래도 미숙 씨는 포기하지 않고 잘 견디어 나갔습니다. 나중엔 성실한 근무로 업무에 능통한 우수사원도 됐다는데요. 그런데도 고용보험이 지급되는 3년의 기간이 끝나자 예외 없이 해고를 당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탈북민을 고용하면 회사 측에 매월 50~70만원 정도, 360~510달러의 고용장려금을 최대 3년까지 주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고용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다른 탈북민 직원을 쓰는 거죠. 해고당한 것이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회사의 사정을 듣고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는 미숙 씨였습니다.

김인선: 더 많은 탈북민들에게 기회를 주려다 보니 3년이라는 기한이 생겼는데요. 미숙 씨도 직업을 잃은 근로자가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재취업활동을 하는 일정 기간, 소정의 급여를 지급하는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셨겠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김인선: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