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에서 6월은 나라를 위해 살았던 분들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특히 현충일인 6월 6일에는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는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탈북민들 대부분이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행사에는 빠지지 않는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단체 활동을 하거나 예술단 활동을 하시는 분들 경우에는 기념일마다 행사들을 진행하거나 예술 공연을 선보이면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고 있고요. 단체장들의 경우에도 보통 한두 가지 일들을 하면서 관련 행사마다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주인공도 그런 분들 중의 한 사람인데요. 대한민국의 여러 유명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가수이면서 대한민국 평화안보대상을 수상한 안보강사, 지역의 홍보대사, 봉사단 단장, 그리고 지금은 건강전도사로서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한옥정 씨입니다.
김인선: 다양한 직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가 있는데요. 바로 'N잡러'입니다. 한옥정 씨에게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은데요. 하루아침에 '프로 N잡러'가 된 분은 없더라고요. 경험도 많아야 하고 열정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도 해야 하거든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한옥정 씨 역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다양한 직업을 가진 'N잡러'가 될 수 있었는데요. 북한에서부터 남다른 능력과 노력으로 큰 기업소의 예술선전대에 들어가 노래도 하고 사회자 역할까지 하며 여러 역할을 해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옥정 씨는 평안남도 평성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무산에서 보냈는데요. 평양에 학생소년 궁전이 있다면 지방인 무산에는 예능을 배우는 2.14 학생소년회관이 있습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별해서 타고난 재능을 더 키울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인데요. 옥정 씨도 그곳에서 노래와 화술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았습니다. 한옥정 씨는 중학교 때부터 학생소년회관 성악, 화술소조에서 교육을 받았고 해마다 설맞이 공연이나 4월 15일 태양절, 2월 16일 광명성절 등 특정한 명절을 앞두고는 밤새워 가며 연습하고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 예술선전대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재능이나 웬만큼 뒷배가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옥정 씨의 경우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연줄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량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배포까지 남달랐던 덕분에 선전대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을 선전대에 받아 달라고 연합기업소 선전대 사무실에 직접 찾아 갔었다고 하니 배짱도 좋고 비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이 북한 당국에서 정해주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옥정 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당히 요구한 거네요. 배포가 정말 대단합니다.
마순희: 네. 어지간한 심장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경제선동을 하는 선전대원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전대 생활이 겉으로 볼 때에는 일반 노동자들에 비할 바 없이 좋은 직업으로 근심걱정 없이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경제적인 부담이 컸습니다. 노동자의 1년 월급을 다 주어도 살까 말까 하는 고가의 선전대 제복을 계절에 맞춰서 스스로 장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 열 명이면 열 명이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공연 연습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옥정 씨는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선전대를 포기하지 않았는데요.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선전대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1998년 6월, 세 살 위인 언니의 갑작스런 탈북으로 더는 무대에 설 수 없는 형편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옥정 씨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언니를 찾아 데려오려고 중국으로 향했는데요. 언니를 만날 수는 없었고 중국에 함께 갔던 어머니, 동생과도 뿔뿔이 헤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옥정 씨는 중국에서 4년 반 동안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했는데요. 그동안 다행스럽게도 헤어졌던 동생, 언니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가족 모두가 소식을 전하게 되면서 한국행을 결심했고 옥정 씨는 가족과 함께 2002년 10월 목숨 걸고 북경영사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03년 1월 대한민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다행히 가족이 모두 만나 무사히 입국하셨네요. 이제부턴 처음 사는 한국살이가 걱정일 텐데요. 교육 체계나 내용이 많이 달라서 북한에서 했던 일을 한국에 와서 그대로 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은 실정이지만, 예술단원을 했던 분들을 보면 선전대에서 했던 것처럼 공연도 하고 예술 활동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마순희: 네. 다른 분야보다 예술 분야에서는 자격증 같은 것이 없어도 재능은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취업이나 활동하기가 비교적 쉬운 것 같기도 합니다. 옥정 씨의 경우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 하나원을 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때 소문을 듣고 탈북민 예술단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하는데요. 예술단 활동을 권유 받은 거죠. 한국에 가면 꼭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던 옥정 씨였습니다. 그렇게 부르고 싶던 노래를 마음껏 부르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옥정 씨는 기쁜 마음으로 예술단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요. 막상 시작해보니 탈북민들의 공연을 찾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행사장이나 축제에 초청해 줘야 무대를 선보일 수 있는 구조라 수입도, 일정도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술단에서 공연을 하면서도 옥정 씨는 북한에서처럼 자신의 방법으로 정면 승부를 결심했습니다. 선전대에 받아달라고 찾아갔던 것처럼 무작정 한국의 대표 공영방송국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방송관계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출입이 가능한 곳은 방송에 나온 정보, 방청 안내 등 각종 문의를 받는 방송국 시청자 상담실이었습니다. 옥정 씨는 시청자 상담실 직원에게 북한에서 왔는데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그 직원이 가수협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옥정 씨는 이번엔 가수협회를 찾아가 노래하고 싶다고, 노래하겠다고 했고 관계자들은 황당해 하면서도 노래를 시켜보더랍니다. 옥정 씨의 노래를 듣고 난 후 조금만 다듬으면 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었고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옥정 씨는 한국에서 가수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2006년 탈북 여성들로 구성된 그룹, 달래음악단이 결성된 것이었습니다.
옥정 씨는 '달래음악단'으로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시작했는데요. 최초의 탈북민 여성 그룹이었고 북한식 억양으로 북한 노래와 남한 노래, 통일을 기원하는 노래 등을 부르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옥정 씨는 한국에 도착한 지 3년 만에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주요 연예프로그램들과 각종 방송사에서 소개됐고 대중들에게 노래 실력도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여러 연예인들이 나와서 무작위로 나오는 노래를 제대로 불러야 성공하는 ‘도전 1000곡’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였는데, 옥정 씨가 출연해서 우승을 했습니다.
김인선: 한국 가요계는 변화가 굉장히 빠르고 새로운 노래들도 거의 날마다 쏟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말씀하신 프로그램 '도전 1000곡'에는 아주 오래된 노래부터 가장 최근 노래가 다 포함돼 있어요. 노래를 정말 많이 알고 있어야 하는데 옥정 씨는 한국 정착 3년 만에 수많은 한국 노래를 다 섭렵했네요. 가수로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한옥정 씨인데요.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