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오승은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승은 씨는 9살 된 딸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고 했죠?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오승은 씨는 세 아들을 굶기지 않고 싶어서 2000년 중국으로 향했는데요. 인신매매에 걸려 흑룡강성까지 팔려갔습니다. 당시 승은 씨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함께 온 딸이 당시 승은 씨의 뱃속에 있던 아이인데요. 딸이 자랄수록 더 이상 중국 아이로 크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승은 씨는 한족동네에 살면서 조선족 교회에 다녔는데, 그분들의 도움으로 한국행을 결심하고 딸과 함께 2008년 대한민국에 왔습니다. 입국한 후 승은 씨는 북한에 있는 세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경제활동부터 시작했는데요. 아이를 돌보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 쉽지 않아서 딸은 탈북민 자녀들을 대신해서 돌봐주고 공부도 시켜주는 대안학교에 맡겼습니다.
김인선: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승은 씨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제과제빵 강사였죠?
마순희: 네. 승은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2008년 12월에 수료했는데요. 하나원을 나올 당시에 탈북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 경기도 금정에 위치한 한 제과제빵 학원이었습니다. 제과제빵 학원에서 취업훈련을 받으면 취업훈련 수당도 받을 수 있고, 자격증을 취득하면 자격증 취득 장려금도 받을 수 있었거든요. 탈북민들의 취업지원 정책으로 시작된 사업이라 저희들 사이에서는 학원의 인기가 엄청났습니다. 꽤 많은 하나원 교육생들이 교육받으러 학원을 다녔었는데 그때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전공분야에 취직한 사람들도 있고 또 학원의 직원으로 채용돼서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 근무하는 교육생들도 있었습니다.
승은 씨도 바로 그 시기에 제과제빵학원을 다녔는데요.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해도 이미 40대 이상 된 직원을 채용하는 제과제빵 전문업체는 별로 없던 때였습니다. 승은 씨는 학원이 아니더라도 다른 일자리를 찾으려면 자격증을 따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정말 열심히 공부도 하고 취업훈련도 받았습니다. 최종적으로 승은 씨는 금정의 한 제과제빵 학원의 강사로 선택됐고 기술 중심의 취업 대학에서도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승은 씨는 제빵 관련 강사 일을 5개월 정도만 하고 그만두게 됐는데요. 북한에 있는 세 아들의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요양원 내 조리사로 이직을 했기 때문입니다. 조리사로는 3년 동안 일을 했는데, 요양원에서 일하면서 요양보호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해요.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아서 관련 공부를 하고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습니다. 이후 승은 씨는 조리사가 아닌 요양보호사로 근무했고 1년 정도 일 하다가 2015년 8월에 제주도 내 요양원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김인선: 제주도는 관광을 가기엔 최고의 장소인데요.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관광객이 많다 보니 제주도에서도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지만 사실 제주 사투리가 외국어보다 더 알아듣기 어려워서 제주 토박이들과 소통하는 것은 어렵거든요.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이 제주 분이시면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는 거죠. 승은 씨가 경기도 지역의 요양원을 그만두고 제주도까지 내려온 이유가 있을까요?
마순희: 네. 승은 씨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세 아들이 제주도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승은 씨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요양보호사 일을 하게 되면서 북한에 두고 왔던 세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는데요. 그 아들들이 제주도에 거주지를 받았습니다. 오랜 시간 헤어졌던 세 아들이었기에 승은 씨는 더 자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고 망설임 없이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집과 직장도 마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양원 일자리부터 주거공간까지 승은 씨가 제주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은 담당 형사님인데요.
사실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면서 가장 도움을 많이 받는 분이 담당 형사님들입니다. 2010년 이후부터 탈북민들의 지역 적응을 돕는 하나센터나 전문상담사 제도가 생기면서 좀 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담당 형사님들이 그 역할을 다 맡아 주셨습니다. 하나원에 우리를 데리러 와 준 분이 담당 형사들이고 우리들이 한국정착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취업훈련이나 취업, 그리고 생활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담당형사님과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승은 씨도 정착하면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담당 형사님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할 정도로 형사님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김인선: 고마운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승은 씨가 제주도에서 잘 지내는 것이 형사님에게 보답하는 일이겠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항상 낙천적이고 성실한 승은 씨이기에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승은 씨는 제주도에 와서도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모두 내 부모님 같다는 마음으로 돌봐 드렸고 어르신들도 친자식 대하듯 승은 씨를 따랐습니다. 승은 씨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표현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천성이 착하고 성실한 승은 씨는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는 제주도의 탈북민들로 조직된 봉사단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김인선: 그대로라면 제주도에서 든든한 기반을 마련하고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지금은 승은 씨가 전라도 광양에서 지낸다고 하셨잖아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승은 씨는 2018년 광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는데요. 여전히 요양원의 요양보호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은 둘째 아들과 딸이라고 하더군요. 제주도에 거주지를 받았던 세 아들 중 첫째와 막내는 각각 서울과 경기도로 직장을 옮겼다고 합니다. 큰 아들의 올해 나이는 37살, 둘째 아들은 35살, 막내 아들은 33살. 그리고 승은 씨와 함께 입국했던 9살 딸은 25살이 되었습니다. 승은 씨의 나이도 올해 61살이 됐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됐는데요. 여전히 경제활동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사 경력만 10년이 되었기에 이젠 어르신들의 표정만 보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기분상태까지 환히 알 수 있다며 업무에 자신감을 가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승은 씨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참을 수 없는지를 알게 됐다고 말하는데요. 승은 씨가 살아온 삶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어디를 가서 살든지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 되는 것도 내 마음에 따라 달라지고 잘못 되면 그것도 내 탓’이라고 말하던 승은 씨의 말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네 자녀를 훌륭히 키워낸 자랑스러운 어머니이자 자식 같은 요양보호사로서의 업무에 충실한 오승은 씨의 삶이야말로 마음과 목표를 세우고 노력한다면 더 나은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정한 성공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현직에서 요양보호사로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오승은 씨, 오늘도 출근길을 재촉하고 있을 그의 힘찬 발걸음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김인선: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앞으로 살아갈 삶이 달라진다는 걸 보여주신 오승은 씨였습니다. 세 아들과 딸,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기까지 치열하게 살아낸 오승은 씨에게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애쓰셨다고 전하면서 마순희의 성공시대, 인사드리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