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엄마의 치킨집을 물려받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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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마인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인희 씨는 인천에서 치킨집을 운영한다고 하셨죠?

마순희: 맞습니다. 2006년 마인희 씨는 한국에 입국한 분이신데요. 현재 인천 남동구에서 남편과 함께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업장으로 치킨집을 내기까지 4년이라는 준비 기간이 걸렸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한 기간은 7년인데요. 그만큼 인희 씨는 치킨집을 시작하기까지 신중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처음엔 북한에 있는 두 딸을 데려오기 위해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시작했던 인희 씨였습니다. 그래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무리해서 일을 하면서 허리디스크 수술까지 받는 지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재수술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 후 육체적으로 덜 힘든 일을 찾으면서 치킨집에서 부업을 하게 됐는데, 일을 하면서 인희 씨는 자신도 치킨집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희 씨는 치킨집 부업을 4년 동안 하면서 닭 튀기는 것부터 치킨집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기술과 영업 비법을 익히는 것이 4년이나 걸리는 것은 아니었는데요. 치킨집을 낼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준비기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어떤 식당을 하든지 위치 선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방송>

[마순희의 성공시대] – 탈북엄마의 치킨집을 물려받다 (1)

[마순희의 성공시대] 내 힘으로 달라지는 삶 (2)

김인선: 뭐든 성급하게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데요. 인희 씨는 조급해하지 않고 신중하게 때를 기다린 것 같아요. 그만큼 좋은 기회를 찾을 수 있었겠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4년의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소 옆에 한 식당 자리가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상의하고 또 경험이 많은 지인분들, 그리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가면서 가게를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 다른 가게들도 없지 않았기에 인희 씨가 처음 가게를 내올 때 주변에서는 석 달을 못 버틸 거다, 혹은 반년이나 가겠냐 했다는데요. 그 우려가 물색할 만큼 지금까지 10년 넘게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게 된 코로나비루스 시기도 잘 넘겼고, 물가상승으로 재료비 등 지출비가 많아진 상황도 이겨냈습니다.

인희 씨네 치킨집은 가맹점이었는데요. 가맹점의 경우 본사에서 닭이나 양념 같은 것은 다 공급해 주기에 당장은 일하기 편하지만 본사에 그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의 수익은 줄어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희 씨는 가게가 알려지기까지 남들이 한 주일에 한 번 쉬는 날도 쉬지 않고 영업을 했습니다. 쉬는 날이라야 누구나 다 쉰다는 음력설이나 추석 때 뿐이었습니다. 남들 쉴 때 똑같이 쉬면서 일한다면 언제 자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쉼도 없이 달려 온 시간들이었습니다. 남편의 도움도 컸습니다. 남편은 평범한 직원 그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가게의 모든 설비나 환경에 대한 점검, 관리까지 모두 남편이 도맡았고, 영업을 하면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도 남편의 몫이었습니다.

김인선: 인희 씨 부부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늘 함께 하시네요. 두 사람은 북한에서부터 함께 했는지, 한국에 와서 만난 남남북녀 커플인지 궁금해요.

마순희: 네. 인희 씨 부부는 중국에서 만났습니다. 2006년에 북한을 떠난 인희 씨는 중국에서 식당 일을 하면서 지냈는데요. 적당한 거처가 없었던 처지라 연변의 한 교회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집사로 일하고 있던 중국인,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되었고 얼마 후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한 남자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인희 씨였는데요.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의 고자질로 공안에게 잡혀 북송되었습니다. 당시 북송된 사람들 대부분은 노동단련대에 잡혀가는 때였는데요. 다행스럽게도 인희 씨는 용서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살아 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인희 씨 역시 북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고 사흘 만에 다시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남편은 인희 씨가 너무 반가웠지만 계속 중국에 있으면 또다시 북송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인희 씨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자신의 집문서를 담보로 비자도 발급받아 주었을 만큼 남편의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두 사람의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인희 씨는 국제결혼 수속을 통해 남편을 한국에 데려왔고 새롭게 한국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하는 아들도 태어났고 북한에 있던 인희 씨의 두 딸들도 모두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인희 씨의 두 딸들을 친자식처럼 여겨 사랑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오게 된 인희 씨의 두 딸들은 새 아빠와도, 처음 만난 어린 동생과도 큰 갈등 없이 잘 지냈습니다.

김인선: 인희 씨 두 딸과 아들의 나이가 제법 차이가 나겠어요. 두 딸들이 인희 씨를 많이 도와주겠는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인희 씨가 가게 일로 시간이 없을 때에는 딸들이 집안일이나 가게 일도 돕고 어린 동생도 살뜰히 보살펴 주었기에 인희 씨가 마음 놓고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희 씨가 쉬는 날도 없이 치킨집을 운영하다 보니 어린이집이 쉬는 날이면 어린 아들을 돌보는 것은 으레 누나들의 몫이었습니다. 누나들은 어린 동생의 훌륭한 보호자였을 뿐 아니라 교육자이기도 했다는데요. 덕분에 인희 씨의 아들은 유치원에 가서도 공부를 제일 잘하는 어린이로 사랑받았고, 아빠, 엄마는 물론 누나들의 사랑까지 듬뿍 받으며 잘 자라 주었다고 합니다. 어린 아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이제는 엄마보다 누나들을 더 먼저 찾는다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인희 씨의 티없이 맑은 모습을 보면서 온 가족이 다시 모여 진짜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더라고요. 큰 딸은 시집을 갔고 이달에는 예쁜 손주의 돌잔치를 한다고 합니다.

김인선: 인희 씨가 이제 막 50이 넘었는데, 벌써 할머니가 되셨네요. 막내 아들은 삼촌이 되는 건데, 아직 학생이죠?

마순희: 네. 고등중학교 2학년 학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빠보다 훌쩍 더 커버린 아들은 유치원 때부터 공부를 잘 한다고 하더니 학교에 가서도 누구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성적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다고 합니다. 아들이 큰 만큼, 인희 씨에게는 세월의 흔적이 남았는데요. 몇 년 전부터는 몸이 안 좋아서 치킨집 운영에서 조금씩 손을 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작은 딸이 사장으로 사업을 물려받아서 하고 있다는데요. 한 마디로 인희 씨는 명예회장이 된 겁니다. 그동안 부모님과 함께 같은 가게에서 일해 오던 작은 딸이기에 식당 운영이나 음식 만드는 것까지 엄마의 솜씨를 그대로 물려 받았다고 합니다.

최근 인희 씨 부부는 한국에 함께 온 언니네가 살고 있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 건강을 돌보면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강 회복을 위해 편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마인희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공도 중요하지만 건강도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저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세 자녀들과 사위, 남편과 함께 하는 인희 씨의 행복한 일상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김인선: 한국에 와서 자기 명의로 된 가게를 내고 그 일을 딸에게 물려준, 가업을 이어나가는 탈북민 가족의 이야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인희 씨가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치킨집을 종횡무진 하셨으면 좋겠네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