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윤혜원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자녀를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는 말을 하면서 지금은 잘 성장한 혜원 씨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지금은 25살, 성인이 된 큰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미용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혜원 씨가 마음고생을 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남자 미용사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혜원 씨 아들이 관심을 보였던 미용 분야가 손톱을 예쁘게 장식하는 네일아트였습니다. 그래서 혜원 씨는 막무가내로 반대했지만 남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남편은 아들과 함께 속을 터놓고 긴 이야기를 나누더니 아들 편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하고 싶은 일을 못 찾고 방황하는 경우도 많은데 자신의 목표가 뚜렷하니 그대로 지지해 주고 지켜봐 주자며 오히려 혜원 씨를 설득했습니다.
김인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결국 혜원 씨도 아들의 결정을 받아들이셨잖아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2004년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할 때 군용 배낭에 넣어 남편이 어깨에 지고 가던 5살 아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진로 문제에 대해 부모를 설득시킬 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탐탁지 않았지만 막상 아들의 결정을 인정하고 보니 처음 북한을 떠날 때가 떠오르면서 심성 곱게 자란 아들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군용 배낭 속에서 찬 물에 젖으면서도 5살 꼬마가 들킬까 봐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으니 혜원 씨 부부의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고마운 어린 아들을 부둥켜 안고 부부가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에는 먼저 탈북한 친정어머니와 동생이 있었기에 혜원 씨 가족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1년 반 정도 지냈습니다. 그 사이 혜원 씨 동생은 한국에 먼저 들어갔는데, 3국을 거쳐서 가는 한국행이 위험한 만큼 우선 동생 혼자 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무사히 한국에 정착한 동생의 주선으로 혜원 씨 부부도 2006년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고 한국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친정어머니와 북한을 떠날 때부터 함께 했던 아들 얘기가 없네요?
마순희: 아무래도 가족이 모두 함께 오려면 브로커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에 아들과 친정어머니는 혜원 씨 부부가 한국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중국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먼저 온 혜원 씨네는 많은 탈북민들이 거주지 신청을 할 때 선호하는 서울 대신 포항을 선택했습니다. 남편이 북한에서 탄광기계공장에서 일했었기에 제철소가 있는 포항을 거주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성실하고 사람 좋은 혜원 씨 남편은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몸이 허약한 혜원 씨에게는 쉬면서 천천히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했는데, 조급한 마음에 혜원 씨는 몸을 돌볼 새 없이 서둘러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버스차고지에서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남들 보기에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혜원 씨에게는 고되고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친정어머니와 아들 생각에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다가 어느 날 출근길에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혜원 씨는 다시 이를 악물고 일어나 회사로 출근했고 그렇게 힘들게 몇 년을 돈을 모아 친정어머니와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늦게라도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게 됐으니 혜원 씨 마음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마음이 안정되고 나니 좋은 것들이 보이고 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넘쳐나는 애기 용품과 예쁜 옷을 보면서 딸을 낳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는데요. 기적처럼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예쁜 공주님을 낳았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던 혜원 씨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후우울증을 앓게 되었는데요. 모든 게 자신이 나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하고 생활하면서 극복해 나가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이 뿌리내린 우울증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혜원 씨의 굳은 결심과 남편, 친정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혜원 씨는 가족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상태가 호전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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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최고의 약은 가까운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죠. 그리고 활동성인데요.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여가활동이나 취미활동을 하는 게 큰 도움이 되거든요. 하지만 많은 탈북민들이 우울증이라는 병을 잘 몰라서 고생하시더라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의사 선생님들이 병원 치료와 함께 여가 활동이나 취미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하는데요. 혜원 씨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취미였던 바느질을 하면서 여가생활을 즐겼습니다. 딸을 위해 직접 재봉으로 바느질하여 공주 방처럼 예쁘게 꾸미는 것은 물론이고 옷가지며 장식용품(액세서리)까지 모든 것을 혜원 씨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취미생활로 배우기 시작한 바느질은 혜원 씨가 옷 수선 가게를 열 수 있는 기초가 되었는데요. 자신의 가게를 열기 위해 전문학원에서 옷 수선을 배웠습니다. 기본적인 수선 교육기간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되고 본인이 희망하면 얼마든지 수선집을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혜원 씨는 거의 1년을 급여도 받지 않으면서 옷 수선 집에서 청소며 잡일을 도와주면서 옷 수선을 배웠는데요.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혜원 씨는 한국에 온 지 5년이 되던 해 자신의 꿈인 수선집을 열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혜원 씨의 변화에 가족 모두가 반가워했겠는데요?
마순희: 네. 특히 남편이 제일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돈을 못 벌어도 좋으니 아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게를 시작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고 말하는 남편이었습니다. 한결 밝아진 엄마의 모습에서 아이들도 덩달아 좋아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혜원 씨가 수선집 일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집안 일부터 가게 청소까지 짬 나면 도와주셨습니다. 온 가족의 지원 속에 혜원 씨의 수선집은 자리를 잡아 나갔고 하나, 둘 단골손님도 늘었습니다. 그러나 세탁소를 겸하는 수선집, 고객의 몸에 맞게 전문적으로 수선을 해주는 곳이 늘면서 혜원 씨는 수선집을 8년 만인 2019년에 정리했습니다. 집에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혜원 씨는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고 요양원에 출근하고 있는데요. 요양보호사가 된 지도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봉사활동 관계로 혜원 씨와 통화를 했는데요. 그동안 가족 모두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미용 일을 하겠다고 혜원 씨 부부를 설득했던 아들은 자신의 진로를 바꾸어 대학을 졸업했고, 해병대까지 전역한 어엿한 대한민국의 청년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취직하기 전에 여러 가지를 경험한다며 건설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독립적으로 자기의 삶을 사는 멋진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은 이제 중3.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혜원 씨 부부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혜원 씨 가족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새 집에 이사를 했고 친정어머니도 건강히 잘 계시고 있다는 소식에 정말 행복한 정착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김인선: 혜원 씨의 경우 본인은 물론 자녀까지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갈 수 있도록 이끌고 있으니 사회구성원으로서도, 또 엄마로서도 최고가 아닐까 싶네요. 혜원 씨의 삶을 통해 독립적인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