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다음 주가 벌써 추석이에요. 지난해만 해도 코로나로 인해 여러 명이 모일 수 없었는데 이번 추석엔 마음 편히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첫 번째 명절이기에 더 반가울 것 같은데요. 요즘 부모님들은 자녀들 고생할까 봐 직접 서울로 올라오시기도 하고, 최대한 간소하게 차례를 지내자며 새로운 집안문화를 선택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마순희: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지내는 분들이라면 손주들은 물론 자녀들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은데 명절 연휴를 맞아 자녀들이 내려오는 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물론 손전화로 영상통화를 할 수도 있지만 손 한번 잡아보고 얼굴 한번 쓰다듬을 수 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평소엔 직장생활 하느라, 또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느라 바쁘니까 명절 때 만이라도 왔으면 하는 거죠. 그런데 오가는데 시간도 많이 쓰고 연휴 이후에 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 자녀들의 상황도 너무도 잘 알기에 부모들이 이동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밀리는 도로 위에서 고생하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음뿐인 것입니다. 표현방법은 다 다르겠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은 모두가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도 자신의 인생 최우선으로 자녀들을 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인데요. 자식들만큼은 자유가 있는 곳에서 키우고 싶어서 탈북을 결심했다는 최한별 씨입니다. 한별 씨는 2009년에 탈북하여 같은 해 6월에 한국에 입국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국까지 직행으로 오신 분입니다.
자녀 미래 위해 탈북하는 북한 부모들
김인선: 실제로 아이들의 교육이나 미래를 위해 탈북한 분들이 있죠. 그런데 한별 씨는 ‘자유가 있는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바깥 세상이 북한과 많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최한별 씨는 군사복무를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의 전연지대에서 했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직접 남조선의 발전된 모습을 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한별 씨는 여느 북한주민처럼 살았는데요. 제대 후 함경북도의 한 국경도시에서 결혼하고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두 딸을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별 씨 가족도 어려움을 겪기는 했는데요. 비록 크지 않은 기업소지만 한별 씨가 당 일군으로 일했었고 아내도 시장에 나가서 조금씩 생활비 정도는 벌어왔기에 여느 집과 달리 무난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삶은 달랐습니다. 게다가 아는 지인들이 하나, 둘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는 한별 씨의 처가집 식구들도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갔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조선에 갔다는 소문이 도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탈북한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탈북하자고 조르던 딸
가족 몰래 두만강 건너
당시 북한정부는 남조선은 썩고 병든 사회라고 강연도 많이 하고 사상교육을 더 강화했지만 전연지대에서 군사복무를 하였던 한별 씨는 한국이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인지는 대체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당국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별 씨는 두 딸이 커갈수록 희망이 보이지 않는 북한 현실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20대에 들어선 두 딸은 자기 친구들이 한국에 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한별 씨에게 탈북하자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한별 씨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처이모님을 통해서 한국의 실정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한별 씨는 딸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북한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굳혀갔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 일군이었던 아버지가 딸들의 탈북을 승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맏딸이 한별 씨 몰래 브로커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던 것입니다. 그 일로 한별 씨의 아내는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머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김인선: 의지가 확고한 맏딸의 탈북으로 아내까지 다치고, 안타깝게 온 가족이 함께 탈북하려던 한별 씨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네요. 일단 아내가 다쳐서 탈북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맏딸 찾아 아내까지
병든 몸으로 두만강 건너
마순희: 그렇죠. 한별 씨의 아내는 심하게 머리를 다쳤기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상황도 못 됐습니다. 그렇다고 부인 곁에서 간병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북한은 직장 일이 먼저였던 사회이기에 한별 씨는 당원돌격대를 이끌고 이동작업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별 씨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한별 씨의 아내는 상처 회복을 다 못한 몸으로 큰 딸을 찾아 무작정 떠났습니다.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작은 딸과 한별 씨의 장모님까지 세 사람이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온 가족이 모두 탈북하자 혼자 남은 한별 씨는 상시적인 감시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별 씨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보다 가족에 대한 걱정이 더 컸습니다. 무사히 한국까지 도착했다는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야 가족 모두가 무사히 한국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됐고 한별 씨는 그제서야 무거운 돌덩이라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그래도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었습니다. 한별 씨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감추고 가족의 생사를 모르는 것처럼 태연히 그 땅의 생활을 이어 나가야만 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 도착한 다른 가족들이 한별 씨에게 소식을 전했다면, 한국행을 권유하지 않았을까요? 한별 씨 역시 혼자 몸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북을 시도할 수 있었을 테고요.
마순희: 당장이라도 가족들이 있는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당 일군이었던 한별 씨는 식구들을 따라 무조건 탈북할 수 없었습니다. 탈북하다가 들키는 날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한국에 가면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고 하던 처이모님의 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온 가족들은 한별 씨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지금도 한별 씨의 장모님은 처가에 그렇게도 헌신적이었던 사위를 두고 딸과 손녀까지 데리고 탈북하던 그 순간의 절박함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온 식구가 함께 모여서 살고 있는 지금도 사위 앞에는 영원히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할 정도니 한별 씨가 북한에 남아있던 때에는 오죽했을까요?
자신만 두고 온 가족이 탈북
결국 떠날 결심을 하다
한별 씨의 장모님과 처, 두 딸은 한별 씨에게 죄스러운 마음에 한국행을 강요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한별 씨의 결단과 결심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지났고 먼저 한국에 온 식구들은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고 한별 씨의 한국행을 위해 브로커를 알선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한별 씨에게 모든 준비를 해 놨다는 소식을 전하고 또 다시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별 씨는 더 이상 가족들의 마음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한별 씨 역시 더는 북한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하루 빨리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엿보면서 만일을 생각하며 아편을 준비하기까지 했습니다. 잘못되면 아편을 먹고 죽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한별 씨가 북한을 떠날 시기로 꼽은 날은 북한에서는 최대의 명절로 손꼽히는 태양절, 2009년 4월 15일이었습니다. 명절분위기로 한껏 들끓고 있는 덕분에 한별 씨는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탈북을 결행했고 두만강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북한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실행은 속전속결이었네요. 일사천리로 두만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행도 순조로웠을까요? 최한별 씨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 에디터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