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높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고 보니, 새 계절에 맞게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데요. 그래선지 여름에 못 다 했던 살까기도 하고, 그동안 미뤘던 책도 읽고, 자기계발을 위해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요즘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도 많아졌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요즘엔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완연한 가을 날씨라서 산책하기도 딱 좋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친구랑 같이 동네에서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자주 나가는데요. 정상에 올라서 건강에 좋다고 유행하는 맨발걷기도 자주 해요. 걷다 보면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이 생기는데요. 활력이 생겨서일까요? 무엇인가 배우고 싶고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시청이나 구청, 복지관 그리고 탈북민 지원재단인 남북하나재단이나 남북통합센터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는 소식을 문자로 전해주니까요. 그 중에서 어떤 프로그램이나 교육을 받으면 좋을지 고민해 보기도 한답니다. 그런 정보들을 잘 활용하면 여가활동을 즐겁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유익한 교육들도 무료로 받을 수 있거든요.
이북5도청에서 새로운 꿈을 찾다
탈북민 중에는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학생들도 많지만 아코디언 강사나 요리 강사 등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분 역시 교육 프로그램 강사인데요. 이북5도청에서 비즈공예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다희 씨입니다. 이북5도청은 통일에 대비해 1949년도에 설치된 행정기구인데요. 지금은 이북5도위원회라고 부릅니다. 실향민과 그 후대의 구호와 지원 등을 도모했던 이북5도위원회는 2004년부터 북한이탈주민 지원 담당 부서를 신설해 그 이후부터 탈북민들을 위한 통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 통일학교에서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컴퓨터교육, 노래교실, 수지침 등 여러 가지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다희 씨도 통일학교에서 컴퓨터 교육과 비즈공예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비즈공예는 작은 구슬로 장신구를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요. 요즘 탈북민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알알이 이쁜 구슬을 꿰어 반지, 목걸이, 팔찌 등을 만드는 비즈공예는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의 친화 뿐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정성이 깃든 선물용으로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희 씨는 비즈공예의 매력에 푹 빠졌고 자신이 교육을 받았던 곳에서 교육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 일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예전에는 바느질이나 종이, 리본 등을 이용해 옷부터 장신구, 장식품 등을 만드는 공예품이 많았는데요. 이런 건 전문가뿐 아니라 주로 어머니들이 취미생활로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 비즈공예는 젊은층에서도 자기 취향에 맞게 본인이 원하는 물건을 직접 만들겠다며 공예수업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다희 씨는 재미삼아서 공예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강의를 할 정도로 전문가인가 보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사실 북한에서는 공예강사나 공예강좌 같은 것은 들어보지도 못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여가생활을 즐기기보다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일들로도 바쁜 일상이었거든요. 물론 부양가족들로 조직한 가내작업반에서 8. 3제품으로 자투리 천이나 입지 않는 옷 등 유휴 재료로 여러 가지 베개모나 베갯잇, 앞치마, 장갑 등 일용품을 만들기는 했지만 팔찌나 반지 같은 장신구를 만들지는 않았거든요.
중국 출신 아버지 덕에
중국친척들 덕을 보나 했는데...
오늘의 주인공인 정다희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희 씨는 2남 3녀 중 셋째 딸로 함경북도의 한 바닷가 도시에서 살았고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근무했습니다. 아버지가 중국출신이라 자랄 때에는 가까이 사는 친척이 아무도 없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고 하는데요. 다희 씨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요청으로 전후 복구 건설에 자원하여 나온 분으로 북한에서 철도대학을 졸업하고 철도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다희 씨는 입당을 하기 위해 늦은 결혼을 했고 남포에서 어렵게 살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의 4촌 언니들이 자신들이 도와줄 테니 중국으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고 다희 씨는 2000년 11월, 6살 아들을 친정집에 맡기고 중국의 언니들을 만나기 위해 함경북도의 국경도시인 남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만남을 약속했던 언니들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희 씨는 한 달 동안 기다리다가 자신이 가지고 떠났던(아버지가 주셨던) 북한 돈 3000원을 내고 브로커의 알선으로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희 씨가 생각했던 계획은 전면 수정됐습니다. 원래는 중국의 4촌들에게 도움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가려 했는데요. 중국에 가서 만난 막내 삼촌이 중국에서 자리를 잡은 후 북한에 있는 아이를 데려오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희 씨는 중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지만 한동안 중국에서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고 자신이 중국에 있다는 것이 전해지면 북한 가족들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숨어 살았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나 2005년 10월, 다희 씨의 아버지가 여권 수속을 해서 중국에 들어오게 됐고 두 사람은 5년 만에 만났습니다. 행방불명으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고 다희 씨의 아버지는 깜짝 놀랐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다희 씨는 송구스럽기만 했습니다.
5년 후 중국에서
폐암 말기 아버지와의 재회
김인선: 놀라움도 컸겠지만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그런데 다희 씨가 그동안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다희 씨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중국으로 들어오셨을까요?
마순희: 네. 다희 씨의 아버지는 폐암 말기로 마지막으로 고향인 중국에 들어오신 걸음이었습니다. 병색이 깊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임을 다희 씨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희 씨는 아버지를 통해 친정집에 맡기고 온 아들이 다희 씨가 북한을 떠난 그 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됐습니다. 돈을 벌어서 아들을 데리러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던 다희 씨였기에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친정 아버지도 다희 씨에게 한국행을 권했고 다희 씨는 2005년 12월 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험난한 노정을 거쳐 2006년 9월 대한민국에 도착했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여느 탈북민들처럼 브로커비용을 물어주고 보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주지 배정을 받고 다희 씨가 처음 시작한 일은 식당 일이었습니다. 말투 때문에 중국 조선족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다희 씨는 굳이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한사람이라고 밝히지 않다 보니 다희 씨는 일 잘하는 연변아줌마로 통했습니다. 오전 11시에 출근하고 밤 11시가 되어야 퇴근하는 생활이었지만 돈을 벌 수 있었기에 힘들 때가 있어도 참고 견뎠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되기는 했지만 혼란해진 머릿속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더 일에 몰두했던 것 같은데요.
탈북민 아닌 연변아줌마로
고되게 살던 어느 날...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일하는 데만 열중하던 다희 씨였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와서 식당일을 시작한지 3년쯤 됐을 때 일하다가 허리를 다쳤는데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밀검사를 해 보았더니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국립의료원에서 치료비 지원을 받으며 척추에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6개월 정도는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고 앞으로는 힘든 일을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김인선: 나이가 들수록 가장 걱정스러운 게 건강이고요.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구라도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신체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인 건강도 잘 챙기면서 살아야 하는데요. 척추수술을 받은 이후의 다희 씨 삶은 어땠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