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지난 10월 10일은 정신건강의 날이었습니다. 정신건강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세계보건기구가 만든 날인데요. 한국에서도 2017년 5월부터 지정됐고 이 시기에 맞춰 정신건강 주간을 정해 다양한 행사도 펼치고 있어요. 지난해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172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유행 전인 2019년보다 14.2%나 늘어난 건데요. 아무래도 외부와 접촉을 줄이느라 집에만 있기도 했고, 이로 인한 경기 침체와 실업률 증가 등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우울감이나 불안감이 커진 것 같습니다. 탈북민분들 중에도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다 보니 외로움이 커져 힘들었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탈북민들의 정신적 어려움
주변에서 알아주지 못하는 게 문제
마순희: 맞습니다. 사실 북한에서의 고된 생활부터 험난한 탈북과정을 거친 탈북민들 중에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지 않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제 경험상으로 봤을 때 혼자 몸으로 한국에서 정착하는 분들이 겪게 되는 정신적 고통에 비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국립의료원에서 근무하던 당시에 정신과 진료를 받으시는 분들을 많이 보아왔고, 제 주변에도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거든요. 하지만 당사자들은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때로는 숨 쉬기조차 힘들어 합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부정적인 기분이 많이 들고 무기력한 증상을 보이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 꾀병 아니면 고통을 과대표현 한다고 오해를 받기도 하거든요. 가까운 지인조차 자신을 이해 못 하니까 더 괴로운 거죠. 탈북민들의 이런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국정부에서는 2010년부터 지역적응센터 설치와 전문상담사 제도 마련, 전문기관과의 협업 등을 통해 탈북민들의 심리상담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병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좋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개선되거나 치유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며 전문 상담가들의 도움도 받게 하는데요. 마음이 힘든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살펴주는 일을 하는 분 중엔 우리 탈북민들도 계십니다. 그 중 한 분이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이신데요. 국립춘천정신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교육부 중앙교육연수원에서 주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숙 씨입니다.
김인선: 탈북민 중에 정신병원 간호사인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 같아요. 일단 북한에서 오신 분들에게 정신병원이라고 하면 남한과는 좀 다르게 느끼시잖아요.
사회와 격리하는 북한의 정신병원
카페처럼 편안하게 상담하는 남한의 정신건강의학과
마순희: 맞습니다. 북한에서 정신과 병원은 민간에서는 49호병원이라고 흔히 불렀는데 정신착란, 정신광란을 앓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에요. 막말로 정신병자라고 할까요. 정신이상환자들을 사회와 격리하는 차원으로 보내는 곳이 북한의 정신병원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와보니 정신과는 감기나 예방접종을 위해 가볍게 찾는 일반병원처럼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병원이라고 하지만 얼핏 보면 동네마다 커피를 파는 카페처럼 예쁘게 꾸며 놓은 곳도 많아서 마음이 힘들 때 누구나 찾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한국에 와서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지만, 탈북민들 중에는 특히 초기 정착하시는 분들 중에는 지금도 정신병원이라고 하면 북한에서처럼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적으로 힘들어하는 탈북민에게 정신과 진료를 권하기라도 하면 엄청 놀라는데요. 제가 국립의료원에서 근무 할 때를 기억해 보면 정신과 진료를 받는 탈북민의 경우 누가 볼 세라 경계를 하며 조심스럽게 다녀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탈북민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심리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정신과 치료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실제로 정신과 진료나 치료를 경험해 본 탈북민분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김숙 씨의 경우 우연한 기회에 정신병원을 접하게 됐습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의 개인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정신병원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말을 빌린다면 2012년, 탈북민을 대상으로 의료부분의 국가공무원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청했는데 당시 김숙 씨와 함께 선발된 인원이 10명이 넘었대요. 그 인원들이 각 지역에 보건소나 국립병원 등에 배치가 되는데 김숙 씨의 경우 국립춘천정신병원에 배치를 받은 것입니다. 개인병원 간호사보다 국가공무원 간호사가 훨씬 나은 위치이기에 김숙 씨는 부산에서 춘천으로 집을 옮기고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김숙 씨는, 자신은 그저 운이 좋게 선발이 된 덕분에 근무하게 된 것이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김인선: 겸손하게 운이 좋았다고 말씀하셨지만, 국가공무원 간호사라는 위치에 맞는 요건들을 다 갖추었기 때문에 선발되셨을 거예요. 간호원 양성소를 졸업만 해도 간호원이 될 수 있는 북한과 달리 한국에서는 국가고시도 봐야 하고 자격증까지 취득해야 현장에서 업무를 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의 간호사는 의사가 없는 부득이한 상황일 때 간호규칙에 따라 의료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에 자격요건이 더 까다로운데요. 의사들과 똑같이 사용하는 의학용어 등 기본적인 이론과 실습 과정을 4년 동안 공부하는 간호대학을 졸업한 후 국가고시를 보고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거든요.
북한의 6개월 과정과 달리
의사 되기만큼 힘든 간호사 되기
마순희: 맞습니다. 제가 살던 때 북한에서는 6개월짜리 간호원 양성소만 졸업해도 간호사가 되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이 낯선 풍경이 아니었는데 한국에서는 의료행위가 불가능한 간호조무사도 780시간의 이론공부와 740시간의 실습을 마치고 국가고시를 거쳐 자격증까지 취득해야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우리 탈북민들 중에 간호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은 많지만 과정도 길고 이수해야 하는 과목들도 쉽지 않기 때문에 중도 탈락하는 경우가 다른 분야보다 더 많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김숙 씨의 경우에는 그 어려운 간호학 공부를 늦은 나이에 시작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올 때 김숙 씨의 나이는 36살, 탈북민들이 등록금 지원을 받으면서 정규 대학에 갈 수 있는 마지막 해였기에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입학한 동기생들 중 김숙 씨의 나이가 제일 많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면 분명히 고생을 할 것이라고 각오를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간호학 공부가 어려웠습니다. 의료기술을 배우는 것도, 외래어, 영어로 된 의학용어를 익히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알아야 할 내용도 외워야 할 분량도 많았는데요. 기본 생리학에서부터 해부학, 병리학, 양학 등 배우는 과목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김숙 씨는 ‘이렇게 배우면 의사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김숙 씨는 힘들었지만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 본 일이 없었을 정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게 가장 큰 학습비법이었다고 했습니다. 입학 당시 성적은 꼴찌였지만 김숙 씨는 4년 후 상위권의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한국 입국 이후 바로 간호대학에 진학을 한 것도 그렇고, 우수한 성적으로 4년 만에 졸업까지 한 걸 보면 김숙 씨는 의료분야에서 일을 해 본 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마순희: 아닙니다. 북한에 있을 때 김숙 씨는 의학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남편이 무역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라 생활 걱정은 크게 하지 않고 아들, 딸 낳아 키우면서 무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중국에 출장 갔던 김숙 씨 남편이 소형라디오를 하나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요. 남편이 외부에서 가져 온 라디오는 다른 방송 청취가 가능했습니다. 김숙 씨는 그 소형라디오를 몰래 숨겨놓고 파장을 돌려가며 여러 가지 방송을 처음으로 듣게 됐고 한국의 방송까지 접하게 됐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김숙 씨는 점점 남한에 대한 동경이 커졌습니다.
김인선: 라디오를 통해 외부 세상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됐다는 탈북민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요. 김숙 씨도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이시네요. 탈북민 분들에 따르면 라디오 방송이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하는데요. 김숙 씨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에디터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