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선생님, 혹시 '재향군인의 날'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마순희: 정확하게는 잘 몰라도 북한식으로 말하면 제대군인이나 군인들을 위한 기념일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아마도 군복무를 하셨던 분들을 위한 날이 아닌가요?
김인선: 맞아요. 재향군인의 날은 전쟁 시기는 물론 평화 시기에 복무한 장병들의 용기와 희생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제정한 날인데요. 나라마다 유래가 조금씩 다르고 기념하는 날짜도 달라요. 미국과 캐나다는 11월 11일이 재향군인의 날이지만 한국은 10월 8월이거든요. 기념일은 달라도 재향군인의 애국정신과 군인정신을 되새기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해마다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는데요. 한국의 경우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어요. 최근까지 남한 전역에서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더라고요. 북한은 어떤가요?
마순희: 네. 북한에도 그 비슷한 기념일이 있긴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에는 해마다 2월 8일이면 조선인민군 창건 기념일이라고 해서 인민군대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써서 보냈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4월 25일, 인민군 창건일도 기념하고 있는데요. 가두에서 생활할 때에도 인민군 용사들에게 위문품을 보낸다고 돈을 거두어 갔었던 것도 기억도 있거든요.
북한에서는 군복무가 너무도 일상적이에요. 남성의 경우 특별히 출신성분에 문제가 있거나 신체적인 결함이 없으면 만 18세부터 무조건 군에 입대해야 하니까요. 물론 한국에서도 18세 이상 남자들에게 병역의 의무가 있지만 군복무 기간이 18개월에서 21개월이잖아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10년입니다. 군 복무 시절에 노동당에도 입당하고 제대할 때에는 배치도 받고 또 대학 추천도 받아가지고 제대되기도 하는데요. 흔히들 군인정신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하지요.
10년 군 복무 후 마주한 참혹한 현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군인정신을 살려 정착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2007년에 탈북한 이영호 씨인데요. 북한에서 10년의 군사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무나 참혹하게 변해버린 사회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영호 씨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영호 씨가 군복무를 시작하기 전에는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제대군인들에게는 일정한 수준의 대우를 다 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제대를 하고 나면 먹고 사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나와 보니 집안 사정도 형편없었고 주변에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북한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영호 씨는 새로운 삶을 위해 탈북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그동안 성공시대에서 소개했던 남성분의 경우 대부분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탈북을 결심한 아빠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셨는데요. 영호 씨는 조금 다른 상황인 것 같아요. 군을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독신 남성이었던 것 같은데, 영호 씨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마순희: 영호 씨의 고향은 북한의 동해안에 위치한 공업도시였습니다. 영호 씨가 군에 입대할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과 누나들 모두 풍요롭지는 않아도 평범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군 복무기간 가족 걱정은 없었는데요. 제대가 다가올수록 영호 씨는 근심걱정이 많아졌습니다. 사회와 동떨어져 10년을 살아오다 보니 사회적응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고 제대를 하게 됐는데 영호 씨의 걱정보다 훨씬 더 고향의 현실은 비참했습니다. 누나들은 굶어 죽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살던 집도 없어지고 어머니는 누나네 집에 살고 계시더랍니다. 말 그대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거죠.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대 후 배치 받은 직장에서 배급도, 월급도 없는 무상노동을 해야 했고 나날이 생계가 어려워졌습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중국에 있는 외삼촌들의 도움을 받는 것 뿐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울 때면 중국으로 몰래 들어가 1년에 한 번씩 외삼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습니다. 영호 씨는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생활 형편도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영호 씨는 어렵게 철도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가고 기술을 배워도
암담한 미래에 탈북 선택
영호 씨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대학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졸업하면 대우도 좋고, 좋은 직장에도 배치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호 씨가 철도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는 배급은커녕 무상교육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돈을 내야 했습니다. 온갖 모금으로 대학이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혁명사적지건설 지원금이요, 수도건설 지원금, 발전소 지원금, 인민군대 후원금 등 모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개인별로 할당된 돈을 내지 못하면 완전히 빚쟁이처럼 독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앞날이 암담하기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영호 씨는 75세 노모와 함께 탈북을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김인선: 탈북은 건장한 성인에게도 힘겨운 길인데 70대의 노모가 험난한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영호 씨도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영호 씨는 외삼촌들이 있는 중국으로 어머니와 누나를 먼저 보냈습니다. 얼마 후 2007년 3월, 북한에 남아있던 영호 씨도 중국으로 향했는데요. 누나는 이미 한국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으셔서 치료를 받느라 함께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는 누나의 연락을 받은 영호 씨는 서둘러 자신도 한국행을 할 생각이었지만 건강이 안 좋은 어머니를 중국에 두고 혼자 한국으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병약한 어머니를 두고
홀로 탈북 할 수 없었던 영호 씨
어머니의 몸 상태가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영호 씨의 모습에, 영호 씨의 어머니는 중국에 더 있다가는 언제 북송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보름 만에 한국으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연로한 몸으로 위험천만한 한국으로의 길에 아들을 따라나선 어머니의 마음이나, 무조건 노모와 함께 한국행을 하기로 결심한 아들의 마음이나 둘 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호 씨는 어머니를 부축하고 때로는 업어가며 중국대륙을 지나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7년 9월에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웃으며 갈수 있다는 영호 씨의 효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김인선: 무사히 어머니와 함께 한국까지 오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두 분 모두의 건강상태가 염려됩니다. 젊은 사람들도 탈북과정을 겪으면서 몸이 많이 망가지는데요. 영호 씨는 어머님을 업고 이동하면서 신체적으로 무리가 많이 됐을 테고요. 영호 씨의 어머니는 치료를 받다가 한국행을 강행했잖아요?
마순희: 네. 영호 씨의 어머님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젊은 영호 씨는 건강 상에 큰 이상이 없었습니다. 당시 영호 씨는 30대 중반이었는데요. 제가 영호 씨를 처음 만난 곳이 탈북민들의 병원진료를 지원하는 국립의료원이었습니다. 영호 씨는 어머님을 의자에 바퀴가 달린 휠체어에 모시고 병원에 왔었는데요. 단 한 순간도 어머니에게서 눈길도 떼지 않고 보살피는 모습을 보면서 참 대단한 효자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영호 씨의 어머니는 검사 결과 심장에 이상이 있으셨습니다. 시술과 치료를 위해 영호 씨 어머니는 의료원에 입원을 해야 했는데 영호 씨는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이 매일 같이 퇴근해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영호 씨의 극진한 마음과 전문 의료진들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하루하루 몰라보게 건강을 회복했고 한 달 후 퇴원이 가능했습니다. 입원 때와 달리 휠체어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실 정도로 쾌차하셨거든요.
김인선: 회사 일을 마치고 매일같이 노모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했는데, 영호 씨의 직장생활이 궁금합니다. 어머님의 건강이 좋아진 만큼, 영호 씨의 한국생활이 순탄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 김인선에디터 : 이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