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10년 전 꿈꾸던 10년 후 나의 모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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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어느덧 달력이 한 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2월이 되면서 한 해를 되돌아보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특히 탈북민들은 한국에 와서 한 해, 한 해 돌아볼 때 감정이 남다를 것 같아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탈북민들은 한국에 와서 새롭게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기에 그만큼 한해 한해를 돌아 볼 때마다 감정이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저도 올해 마지막 달력을 보면서 지난 1년, 아니 한국정착 19년을 뒤돌아보면서 만감이 교차되더라고요. 저 뿐 아니라 누구든지 해마다 12월이 되면 지나간 1년을 뒤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생각하고 계획한다고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해 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그것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장기적인 계획을 이루어 내기도 하니까요. 제 주변으로도 그런 분이 계신데요. 오늘 이 시간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한국 정착 10년 만에 자신의 바람대로 정확히 꿈을 이루어 내신 기적 같은 사연의 주인공인데요. 2004년 11월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지금은 서울 강서구에서 커피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은희 씨입니다. 은희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에 ‘10년 후에 무엇을 하고 싶으냐'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은희 씨는 하나원에서 직업교육을 통해 알게 된 다양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에 관심이 생기던 차라 카페를 창업하고 싶다고 답을 했습니다. 커피와 음료 등을 파는 카페를 하면서 부족함 없이 여유 있는 삶을 즐기고 싶다는 은희 씨의 말에 인터뷰 하시는 분이 웃으면서 ’정말 열심히 사셔야겠어요‘ 라고 했답니다. 그 말 속에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희 씨는 그 후 꼭 10년 만인 2014년에 비록 자신의 가게는 아니지만 커피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데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인선: 저는 하루 다짐도 지키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10년 전의 바람을 이루어 냈다는 김은희 씨가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데요. 어떤 분일지 더 궁금해집니다. 북한에서는 어떤 삶을 사셨나요?

마순희: 은희 씨는 북한에서는 여느 탈북민 여성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녔는데요. 직장 통계원과 부기 등 사무직으로 근무했고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시기에 남편이 사망하면서 생활이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 정도는 탈북 여성들에게 흔한 일상이었기에 은희 씨는 아들을 키우고 친정어머니랑 살면서 어려운 살림을 책임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은희 씨가 살던 고장이 중국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다 보니 10대의 아들이 친구들이랑 중국에 넘어 간 것입니다. 3년이 다 되도록 소식 없는 아들 걱정에 은희 씨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탈북

김인선: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은희 씨는 무엇보다 아들의 생사여부를 알고 싶었을 텐데 소식을 전해 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요?

마순희: 네. 하지만 아들이 집을 나간 지 거의 3년이 다 됐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중국으로 갔던 아들이 직접 연락을 해왔다고 하는데요.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들은 대한민국이 엄마가 알고 있던 썩고 병든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눈부시게 발전되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지금 지내는 게 좋지만 이 좋은 세상에서 엄마랑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며 아들은 은희 씨에게 한국행을 권유했습니다. 아들의 말에 은희 씨는 고민도 하지 않고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함께 살고 있던 친정어머님을 언니네 댁에 모셔다 드리고 아들이 연결해 준 브로커선을 통해서 바로 탈북했습니다. 2003년에 탈북했던 은희 씨는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2004년 11월에 대한민국에 도착했고 사랑하는 아들을 만났습니다.

김인선: 엄마가 한국에 먼저 와서 정착을 한 후에 북한이나 중국에 있는 자녀를 데려오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반대되는 경우는 많이 못 봤거든요. 자녀들의 나이가 2-30대, 많게는 40대인 경우에는 자녀가 먼저 한국행을 하고 브로커 비용을 마련해서 어머님을 모시고 오는 경우는 있지만 은희 씨의 경우엔 아들이 10대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브로커 비용을 마련했을까요?

영특한 10대 아들의 한국행

마순희: 탈북민들에게 제공되는 정착지원금이 있잖아요. 대다수의 탈북민들은 정착지원금을 자신의 브로커비용을 갚는데 사용하지만 은희 씨의 아들은 그 비용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은희 씨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은희 씨의 아들은 중국에서 3년 동안 지냈다고 하는데요. 중국의 부잣집에 입양이 돼서 호적에까지 올렸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인지 매 세대마다 확인 작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중국인들은 고아나 길거리 아이들을 입양하고 가짜 서류를 만들어서 호적을 올리는 일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은희 씨의 아들은 15살 어린 나이에 머리가 영특해서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활용했고 중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물론 중국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국말도 능통해졌고 18살까지 은희 씨에게 조차 소식을 전하지 않은 채 마치 중국 사람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두고 온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은 늘 어린 아들을 힘들게 했고 더욱이 위장신분으로 살아가다 보니 항상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중국에 사는 동안 한국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한국으로 가는 길만이 자신도 안전하고 엄마와도 함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은희 씨의 아들은 중국인 신분으로 북경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영사관 안에서 자신이 탈북자임을 밝히고 한국에 입국했기에 몸도 상하지 않았고 브로커비용도 필요 없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해서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 하나원을 수료한 후 서울에 거주지를 배정받고 나이에 맞는 한국의 교육과정에 입학해 학업도 이어갔습니다. 아들은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은희 씨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김인선: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던 3년 동안은 은희 씨에게 지옥이었겠지만, 은희 씨가 아들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은데요. 자기 앞가림은 물론 엄마까지 챙기는 10대 아들이 일반적이지는 않으니까요. 든든한 아들이 있어서 은희 씨의 한국 정착생활이 마냥 걱정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린 아들에게 마냥 의지하고 살아갈 수는 없었을 테고.. 은희 씨는 한국 정착생활을 어떻게 했을까요?

아들 의지하며 시작한 한국 정착생활

마순희: 맞습니다. 아들은 은희 씨보다 1년 먼저 한국에 정착했다고 엄마의 한국 정착에 많은 위로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은희 씨는 아들과 함께라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 없고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처럼 한국 정착의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생존에 위협을 받던 북한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의식주는 해결되는 남한이지만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또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아들은 아직 18살 교복차림의 고등학생이었고 은희 씨는 한국 입국 당시 47살이었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경력도 없는 40이 넘은 아줌마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고 은희 씨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식당이나 주유소 부업부터 시작했습니다. 시간제 일자리였는데 1시간이라도 더 일을 하면 한 시간만큼의 급여가 더 주어졌습니다. 노임도 배급도 못 받으면서도 직장 일을 해야 했던 북한과는 달리 일을 하면 한 것만큼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은희 씨는 처음에 너무도 신기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은희 씨는 곧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을 만큼 건강상태는 양호했었던 것 같아요. 은희 씨의 앞날도 계속해서 양호했을까요? 김은희 씨의 한국정착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이예진, 웹팀 이경하